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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거룩함/금욕과 거룩함 Ⅱ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9 조회수839 추천수1 반대(0) 신고
 
 
금욕과 거룩함 Ⅱ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살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2-17)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시비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갈라 5,22-26)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세의 삶 안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완전함은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오직 천국에서만 성취될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의 사랑은 항상 실질적이고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완전함은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현세의 삶에서 가능한 완전함이란 하느님의
사랑에 대립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1) 중죄를 피하는 것 -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다.
2) 참된 사랑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 복음에 명시되어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서 수도자들의 서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러한 복음적 권고는 평신도들의 삶에도 해당된다.

평신도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를 들어,
가난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 등을 통해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생활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분의 거룩한 의도에 완전히 융화되어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다.

과거 사막의 교부들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고행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에 유사한 수준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성 카시아노는 이렇게 믿었다.
성 예로니모 역시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후에 그 의견에 반대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현세의 삶에서는
 상대적인 완전함밖에는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성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인간적인 약함과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의 삶에서 모든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초인간이 되려는
 이상을 이단으로 여긴 것은 수도회 역사에 있어 하나의 역설이다.
 그 이상은 '영적' 이상이라기보다는 '육적' 이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에서 인간의 약함과 불안전함은
그가 자신의 비참함으로부터 겸손함을 배우고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대표적인 예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함 때문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7-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상대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획득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며
자신을 비정상적인 격정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평화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자녀로서 마땅히 즐겨야 할 그분과의 친교를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평화는 가혹한 무력이나 폭력,
독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욕구를
억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무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분의 성령에 유순하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의 자비로 얻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욕구를 가라앉히고
고치기 힘든 격정들을 평정시킨다.

만약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하느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듯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갈등 가운데서도 여전히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께서 갈등을 허락하시는 것이
순전히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함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평화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전한 고행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덕행과 고행에 대한 용맹 정진 가운데
내재한 지나친 기쁨까지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들은 거만하지 않았고 자신만만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나 그
들의 덕행은 그들을 영적으로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구약의 예레미야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온전히 지각한 사람들이었다.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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