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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은 다시 부활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사제의 쇄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5 조회수520 추천수3 반대(0) 신고
 
 
부자들에게만 사랑의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빈자들에게도 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빈자들은 오직 사랑만을 먹고 사는게 아니라, 빈자들도 사랑을 나눌 수 있서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약자이지만 영적으로는 강자에 가깝습니다.
 
빈자들에게 '정의'만 알려 주는게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빈자들에게 '사랑'을 알려 주는게 그리스도교의 힘이다고 봅니다. 그동안 어떤 분들(사제단)은 빈자들에게 '정의'만을 중요한듯이 그렇게 심어왔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생명의 씨앗은 '사랑'입니다.
 
빈자들이 자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닐 것입니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약자의 상황 아래에서도 "새로운 기초" , 그리스도의 새로운 토대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들의 사랑의 실천(순교의 정신)은 오히려 주위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빈자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며 빈자들은 '정의'로 투쟁해야 하는게 아니라 '사랑'으로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빈자들을 '정의'의 '수단화'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빈자들은 다시 사랑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빈자의 삶을 '자기 해방'(타인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해방)으로 성취해 내어야 합니다. 가난한 약자, 빈자들은 '정의'에 동원되어 가는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을 실행할 수 있는 실존적인 '강한 자'로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눈여겨 보십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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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래 교회의 [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 ]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 ]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 사랑의 활동 ]은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 그들(부자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 '정의와 사랑' /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회칙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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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랑과 정의를 분리 시켰습니다
 
 
'사랑'과 '정의'는 분리하기 어려운 '하나' 입니다
'사랑의 정의'에 대하여
그들은 속으로는 부정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가득찬 불평등에 대한 한층 더 예리해진 의식은 그 자체가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또 심화시킨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고 인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문헌, 사목헌장 중에서>
 
사람이 목적이다고 말들은 하지만 사람이 수단이 되어 버린 정치, 증오를 유발하는 사상, 증오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이념이 어떻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사람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다른 이야기 일뿐입니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증오와 살상하려 하지 않았지만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입과 손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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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러 교우님들의 각 글 아래에 '댓글'을 바라 보십시오
'정의' 쪽에 있다는 그들은 사람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며
유익한 글보다는 타인을 헐뜯는 미움을 뱉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고 세상은 사람을 위해 마련되어져 있는 것이며 사상인간이라는 존엄한 목적을 위한 지향점으로써 존재해야 했는데 도구로써 사용되는 순간입니다. 사상을 가지고 이상 사회(인간이 아닌 세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세력들에게는 인간을 조종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의'라고 하는 사상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파괴되고 인간 자체가 파괴되어도 사람은 단지 '정의'라고 하는 인간 사상의 수단이고 신앙은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좌, 우 ...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좌의 세계 , 우의 세계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것이 진리인 양 따라가야 했습니다. 좌와 우의 세계는 정의를 소리치는 이념주의자들이 만들어 내었지만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이렇게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랑과 인간을 업신여기는 절충주의자들은 또한 하느님 신앙을 인간 사상의 어둠 속으로 던져 놓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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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어버린 (없다는게 아니라, 소홀히 여기는) 시대
교회와 어떤 사제단은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를
깊이 다시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의 뼈와 살을 깍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동안 통상적으로 삶을 보장하는 '물질적인 기초'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굳건히 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존에 더 좋은, 길이 남고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토대'를 발견하였기에 이 기초를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새로운 자유'는 즉, 우리가 받은 '새로운 기초'에 대한 인식은 이데올로기와 정치 기구의 횡포에 저항하여 죽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저버린 포기(자신을 내어 주는 가난)의 위대한 행위(빈자들의 사랑)에서 찾아볼 수있습니다. 

이들의 경우 '새로운 기초''참다운 기초'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난 이러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어둠(소외) 속에서 희망없이 사는 이들은 희망이 솟아났습니다. 

이들의 '새로운 기초', '새로운 생명'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마련해 주는 '참된 기초'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생명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목자이십니다."  <베네딕토16세교황님 회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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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역사)를 살아가는 사람(사랑의 모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정의'가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교회 안에서 "쇄신"이란 신앙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으로 사랑이 퍼지고 커지며 사람들 가운데 평화와 생명의 새로운 토대가 형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이라는게 오래되고 낡은 정신,
마르크스 이후에 살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진부하기만 하는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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