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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102 - 위령의 날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02 조회수1,49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11 02 () 가해 위령의 날 복음 묵상

The Commemoration of All the Faithful Departed

[첫째 미사] 욥기 19,1.23-27 / 로마서 5,5-11 / 마태오복음 5,1-12
[
둘째 미사] 지혜서 3,1-9 / 로마서 5, 5,17-21 / 마태오복음 11,25-30
[
셋째 미사] 지혜서 4,7-15 / 로마서 6,3-9 / 마태오복음 25,1-13


[
첫째 미사]

욥기 19,1.23-27
로마서 5,5-11
마태오복음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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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욥기 19,1.23-2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
,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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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Reading 2


Rom 5:5-11

Brothers and sisters: hope does not disappoint, because the love of god has been poured out into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has been given to us.
For Christ, while we were still helpless, died at the appointed time for the ungodly.
Indeed, only with difficulty does one die for a just person, though perhaps for a good person one might even find courage to die.
But god proves his love for us in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How much more then, since we are now justified by his blood, will we be saved through him from the wrath.
Indeed, if, while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how much more, once reconciled, will we be saved by his life.
Not only that, but we also boast of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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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오복음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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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11 02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11월은 교회 전례력으로 위령 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특히 위령 성월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며, 둘째 날은 ‘위령의 날’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 뜻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누리고 있지요. 따라서 성인들을 본받아 연옥 영혼들도 빨리 하느님 곁에 갈 수 있도록 첫째 날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둘째 날을 ‘위령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는 저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분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께 되돌아가신 조상님들, 부모님, 남편이나 아내, 형제와 친척, 친지, 그리고 은인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잠시 그렸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더욱이 요즈음,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고인들을 잊어버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만큼은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리며, 그분들이 남긴 뜻과 못다 한 일들을 기억하고, 이를 가꾸어 나가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잘 맞이하도록 하루하루 의미 있게 지내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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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1 02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절대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자신의 생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지요. 세상에서의 모든 사람과, 그리고 자신이 남겨 놓은 모든 것과의 이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죽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는 사실이지만,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묵상하며 인생의 행복을 함께 묵상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앙이 주는 선물은 바로 이 인생의 최종 절벽을 넘어서게 하는 희망입니다. 희망은 오늘의 좌절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하느님을 보고야 말리라는 욥의 외침은 그 희망의 척도를 가늠케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행복도 이러한 초월적 신앙이 없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숲들이 잎을 떨구고, 모든 동물이 긴 겨울잠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자연스레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도 자연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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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10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어제가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천상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하는 지상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하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이었다면, 오늘은 지상 교회가 정화 중에 있는 연옥 영혼들과 죽은 모든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오늘, 어머니인 교회는 정화 중에 있는 자녀들을 위한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미사 세 대를 봉헌하는데, 첫 번째 미사 독서의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는 욥의 독백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살갗이 다 벗겨지고 없어진 다음에는, 하느님을 볼 수 없을까요? 우리 몸이 스러졌다 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보살피심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더욱 희망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입증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우리는 더욱 확실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 있든 세상을 떠난 다음이든, 우리가 죄인일 때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룬 다음이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풍성하게 부어져 있기에 죽음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욥처럼 우리는 그분을 반드시 뵈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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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1 0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욱 널리 알려진,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라는 소설은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흥미와 깊이를 가진 작품입니다. 이 소설 곳곳에는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는 인상적인 장면도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고백을 들으며 이 소설의 여러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소년 파이는 가족과 함께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 가기 위해 그들이 운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만 파선되어 위기에 놓입니다. 가족도 동물들도 모두 잃은 채 소년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구명정에 남았는데, 그 보트에는 불행하게도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이미 타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하는 호랑이와 함께 보트에서 227일을 표류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삶과 종교적 체험에 대한 속 깊은 우화이자 상징이라 하겠습니다.
소년은 마치 욥이 그랬듯이 죄 없이, 이유 없이 너무나 큰 고통을 겪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이미 이렇게 밝힙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이 말은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소설은 소년이 이러한 확신에 다가가는 내적 여정을 보여 줍니다. 소년은 공포심과 자포자기의 유혹을 이겨 내며, ‘살아서 그분의 얼굴을 보리라.’는 희망을 악착같이 쥐고 있었던 오늘 독서의 욥처럼, 바다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가장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던 구명정 안의 호랑이였습니다. 호랑이는 그가 생의 의지를 잃지 않게 하면서 긴장감으로 버티게 했던 것입니다. 이 ‘호랑이의 존재’는 우리 인생길에서 때때로 맞닥뜨리는, 무정하고 매정하며 잔인하게까지 다가오는 하느님의 ‘얼굴’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욥은 이러한 하느님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소년 파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그 ‘잔인하고 두려운 얼굴’에 사실은 그분의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믿고 기다리며 끝까지 분투하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 속에서 우리는 진정 새로 태어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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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 11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면서 아울러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순례할 때에 겪은 일입니다. 새벽녘에 걷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적어도 1킬로미터에 한 번은 화살표가 보여야 하는데, 그 표시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지도를 펼쳐 놓고 동행하던 이들과 함께 현재의 위치가 어디인지, 본디의 순례 길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을 만났고, 그의 안내로 길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가기까지 두어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인생행로는 어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제대로 걷고 있는가, 아니면 길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생은 석재(石材). 여기에 신의 모습을 조각할 것인지, 악마의 모습을 조각할 것인지는 개인의 자유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 스펜서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행복을 향한 인생길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실 뿐 아니라, 몸소 그 길을 충실히 걸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곧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갈 것인지, 다른 길을 걸을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행복의 인생행로에서 우리 자신이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벗어나 있다면, 지도를 다시 보고 많은 사람의 충고를 들으며 제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안식처를 보고 기뻐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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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 11 02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조건을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일수록 가난한 나라보다 이혼율이 높습니다. 자살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장의 대가로 치르는 통증 또한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국 34개 나라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제일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면 삶의 질과 행복 지수도 높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 렇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어도 그분께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며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처지를 주님께 맡겨 드리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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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1 02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 불행 49% 행복 51% /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 행복의 조건엔 /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 // 1%가 우리를 행복하게 / 또 불행하게 합니다. / 나는 오늘 그 1% /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행복하다고 …….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과 속()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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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1 02)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참행복은 곧 당신 자신이시고, 당신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의 거룩하신 그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얻어 누려야 할 참행복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참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연령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행복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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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1 02)


음력 10월이 되면 시제(時祭)라는 것을 지냅니다. 5대 이상의 선조들을 함께 기억하며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벌초도 하고 무너진 곳도 손질합니다. 먼 친족과는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직계든 방계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위령의 날’은 ‘서양의 시제’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사제들은 세 대의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된 특전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는 취지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애정 때문입니다. 그분들 역시 모두를 잊어버린 채 천국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남은 이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십니다. 죽음 저쪽에서 ‘행복을 누린다면’ 지상의 가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만이 통교의 대상은 아닙니다. 연옥 영혼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도 기도해 주십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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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1 02)


우리는 행복한지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남모르는 고통과 걱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재산이나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행복은 그러한 것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고통과 산더미 같은 걱정 속에 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민이나 걱정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걱정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은 분명 아닙니다.
행복은 결과입니다. 정성을 드린 만큼 되돌아오는 꽃이며 열매입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나무 역시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겨울을 견디어 냅니다.
복음 말씀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줍니다. 마음의 가난입니다. 슬픔과 억울함을 참아 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먼 곳이 아니라 함께 부딪치며 살고 있는 가족 안에서 먼저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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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1 02)


‘마음의 가난’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름답거나 화려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힘겹고 두려운 표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겠습니까? 아무 욕심도, 아무런 욕망도 없는 마음이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솟구치고 욕망이 흔들더라도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본능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일으키는 충동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능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절제입니다. 그런 절제를 지닌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이가 많습니다.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에는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제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능만을 따라간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슬퍼하는 이도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슬픔을 견디어 낼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도 그 원인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참행복에 담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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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02 () 가해 위령의 날 복음 묵상

[
둘째 미사]

지혜서 3,1-9
로마서 5, 5,17-21
마태오복음 11,25-30


1독서


지혜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Reading 1


Wis 3:1-9 

The souls of the just are in the hand of God, and no torment shall touch them.
They seemed, in the view of the foolish, to be dead; and their passing away was thought an affliction and their going forth from us, utter destruction.
But they are in peace.
For if before men, indeed, they be punished, yet is their hope full of immortality; chastised a little, they shall be greatly blessed, because God tried them and found them worthy of himself.
As gold in the furnace, he proved them, and as sacrificial offerings he took them to himself.
In the time of their visitation they shall shine, and shall dart about as sparks through stubble; they shall judge nations and rule over peoples, and the LORD shall be their King forever.
Those who trust in him shall understand truth, and the faithful shall abide with him in love: because grace and mercy are with his holy ones, and his care is with his elect.


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오복음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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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11 02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위령의 날을 맞아 특별히 연옥에서 단련 중인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속을 통해, 또는 대사(大赦)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한 잠벌(暫罰)을 없앱니다.
그렇다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어떻게 잠벌을 없앨 수 있습니까? 이에 가톨릭 교회는 전대사(全大赦)를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양도하도록 권합니다. 이는 나의 공로로 연옥에 있는 어느 영혼에게 남아 있는 벌이 없어지고, 그럼으로써 그 영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연옥에서 정화 중인 영혼의 보속 기간이 단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은총으로 단축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연옥에 머물러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줌으로써, 그들이 더욱 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이제는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부족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11월 한 달, 가장 버림받은 영혼이나, 기억해 줄 사람 없이 외로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나와 귀한 만남을 맺었던 이들을 떠올리며, 그 만남이 천상에서도 지속되도록 그들의 뜻을 기억하며 꾸준히 기도하고 선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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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1 02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죽음에 대한 묵상은 삶에 대한 묵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거나 인생무상을 드러내는 표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죽음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대한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더 나아가 죽음의 순간과 그 결과로 따라오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거꾸로 우리의 삶을 비추어 주는 참된 빛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이 순간을 기준으로 내 삶을 반추해야 하는 거울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겉으로만 보이는 인생의 외적 가치를 넘어서는 참 진리를 드러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드러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1독서인 지혜서의 말씀도 의인들이 받는 고통이 겉으로는 하느님의 벌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들을 단련시키시고 제련하시는 지극한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참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고통을 그분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굳건하게 견디어 내고 이겨 냄으로써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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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10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자유와 이성을 지닌 위대한 인간이지만, 한계도 지닌 나약한 인간임을 지적하면서, 죄와 죽음의 지배도, 생명과 의로움의 지배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는 이 말씀은,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원죄 교리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죄를 범하기도 전에, 죄로 물든 세상에 태어나 이미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데도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악한 일을 하게 한다고까지 개탄합니다(로마 7,20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고 생명을 받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눈을 감는 순간, 열심히 훌륭하게 잘 살았으므로 마땅히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떠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담의 죄보다 훨씬 더 강한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불안해하거나 그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병고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셨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셨고,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하고 고백하면서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세상을 떠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활의 신비를 믿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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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1 0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위령의 날이 되니 신학생 시절 해마다 전교생이 용인이나 용산의 성직자 묘역에 미사를 드리러 간 일이 떠오릅니다.
미사 전에는 선종하신 신부님들의 묘소를 둘러보며, 또 그분들의 묘비에 새겨진 성함을 보며 잠깐씩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숙연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할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듯한 따스함과 평온함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이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가운데 참된 평화를 누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생전에 직접 모시거나 뵐 기회가 있었던 ‘할아버지 신부님’들의 성함을 묘석에서 발견하였을 때에는 반갑기도 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영원한 평화를 저도 잠시나마 나누어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슬픈 운명의 확증인 것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얻게 되는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문이기도 한 점을, 그분 품에 먼저 안긴 분들을 참배하면서 다시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 안에서 ‘철부지’가 된 이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입니다. 지혜서가 말하듯, 세상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음으로 끝장에 이르렀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아이’들인 그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에 돌아가신 분들이 말없이 전해 주는 ‘죽음의 신비’에 잔잔한 마음으로 머물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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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 11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을 지나가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라고 쓰인 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는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그 밑에다 “그다지 큰 악인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하였습니다. 표를 받아 든 그는 “의인이 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그러나 또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쓸모없는 죄인입니다.”라고 다시 고쳐 썼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거절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그는 “죄인”이라고 쓰인 표를 그대로 지닌 채 천국 문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문을 열고 그를 천국으로 넣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를 진심으로 믿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의 철부지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도저히 성숙할 수도, 의로울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하고 철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철부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걷기만 한다면 우리를 참된 안식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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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 11 02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요즈음 많은 교구에서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이루려면 긴 인내의 시간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소공동체 모임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인지 혹시 아십니까? 바로 성당 묘지입니다. 한 번 묘지에 묻히면 이사를 가는 분도 거의 없고,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많은 분들이 성당 묘지를 찾아가 미사를 드립니다. 묘지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문득 임옥당의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 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많은 얘기가 숨어 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었다./ 살아 있을 적에는/ 지위와 재물이 그들을 갈라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곳에 나란히 누워 있다.// …… 홀연히 나는/ 내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남하고 다투거나 그들을 비평할 필요가 무엇인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리고 죽음이 무섭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각하게 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죽음은 그다지 두렵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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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1 02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주님, 또 한 분의 교우를 주님께 보내 드립니다. 이 사람이 살아온 시간 동안 지은 죄는 묻지 마시고 그가 살아 내야 했던 삶의 멍에만 생각해 주십시오. 설령 그가 주님께 충실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운명처럼 부여된 삶의 멍에를 한평생 지고 살아 냈다는 그것만으로 그는 아름답고 위대해 보입니다. 주님, 저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본당에서 장례 미사를 드리고 고인과 장례 행렬이 성당 문을 빠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바치는 저의 기도입니다. 장례 때마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는 생각할 것 없이 한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 보내는 순간은 그가 살아온 일생이 그저 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해서 ‘잘 살았다’ 또는 ‘못 살았다’ 할 때, 주님 앞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판단과 평가일 따름이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주님께서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 눈에는 그가 살아왔던 그 모든 이야기가, 설령 우리 눈에는 온통 죄스러운 삶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한계와 약함을 가지고 최선을 살았던 그의 장한 모습만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도, 주님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가지고 그 나름대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죄스럽고 못난 모습도 있는 그대로 주님께서는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을 다 하신 분이시기에 누구보다 우리의 약함과 한계를 잘 아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됩니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가벼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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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1 02)


우리는 누구의 속박이나 굴레에 놓이게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온전한 자유인이고 싶어 합니다. 멍에는 바로 속박이고 굴레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멍에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께 속박받고 구속받고 싶어 합니다. 주님만이 참행복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죽음의 굴레에서 구원하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죄로 찌든 우리의 삶을 그분께로 돌리고, 그분께서 주시는 멍에를 멜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의로움, 평화, 희망, 온유와 겸손, 사랑과 생명의 멍에입니다. 그 멍에는 실천할수록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세상 안에 사는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고, 그분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평화와 진리와 생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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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02 () 가해 위령의 날 복음 묵상

[
셋째 미사]

지혜서 4,7-15
로마서 6,3-9
마태오복음 25,1-13


1독서


지혜서 4,7-15

7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8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9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10
하느님 마음에 들어 그분께 사랑받던 그는, 죄인들과 살다가 자리가 옮겨졌다. 11 악이 그의 이성을 변질시키거나, 거짓이 그의 영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들어 올려진 것이다. 12 악의 마력은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13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14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마음에 들어, 그를 악의 한가운데에서 서둘러 데려가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15 곧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6,3-9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Reading 2


Rom 6:3-9

brothers and sisters:
Are you unaware that we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We were indeed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so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ight live in newness of life.

For if we have grown into with him through a death like his, we shall also be united with him in the resurrection.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our sinful body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might no longer be in slavery to sin.
For a dead person has been absolved from sin.
If, then,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shall also live with him.
We know that Christ, raised from the dead, dies no more; death no longer has power over him.


복음


마태오복음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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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11 02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우리는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살펴보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평소 행동이나 습관, 기도 생활까지 염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 험한 세상에서 온갖 유혹과 불의, 나태를 극복하고 정의와 평화,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이미 죽음의 세력을 이긴 참된 삶일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면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맞게 되는 죽음의 순간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끝없는 욕망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앞두고는 새롭게 눈을 뜨게 되지요. 재물, 명예, 권력이 모두 헛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계심을 깨닫게 되며, 진정 귀한 가치를 알게 되지요. 이렇게 죽음은 참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별하도록 이끌어 주기에 은총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하루하루를 참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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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1 02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복음서 안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준비하듯이 그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있다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준비를 할 텐데,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준비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시험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등불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 중 다섯이 악한 자들이었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조금은 이해가 될 텐데, 그들이 어리석어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문밖으로 쫓겨났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준비하는 위령 성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삶의 기준을 재정립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잘 맞이하려면 착하고, 정성스럽고, 죄짓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혹시 내 등불에 기름이 부족한지, 심지가 다 타들어 가지는 않았는지, 바람막이는 잘 준비되어 있는지 두루두루 살펴보는 지혜까지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꼼꼼히 잘 준비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신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신부의 두근거리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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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10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천사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 십사만 사천 명! 시한부 종말론과 연관된 사이비 종파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숫자를 십사만 사천 명으로 못 박고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이 숫자는 상징적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나온 숫자로서, 완전하게 가득 채워진 숫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와 가까운 의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인들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성인들의 수를 수천 명, 수만 명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져서 천국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들, 하느님께서 사랑을 베푸시어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 이들은 그리스도를 닮아 순결하게 되어 언젠가 그분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정의와 자비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갈망도 언젠가 채워져, 하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니, 이런 분들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 명뿐이겠습니까!
“성인들은 인간이었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성인이 되셨다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고백대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나도 성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어떻게 살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성인은 맡은 일에 열중하며 주어지는 모든 일을 거절하지 않는다. 성인에게는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행의 좋은 기회가 될 뿐이다”(루이 라벨). 성인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이 매우 인상적인데, 아마도 이렇게 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영원하니, 눈을 들어 하늘 바라보기를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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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1 0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저는 스물일곱에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불어 초급반에 등록했는데, 운 좋게도 여름 어학연수로 프랑스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체험했던 여러 장소와 사건이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눈앞에 그려집니다. 유명한 관광지와 성지도 둘러보며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파리에서 며칠 머문 숙소였던 대학교 기숙사의 한 방문에 붙어 있는 그림 한 장이었습니다. 그 방의 주인은 학생일 것이고, 그는 여름 방학이어서 고향에 갔던 것 같습니다. 머무는 동안 늘 닫혀 있던 그 방문에는 도화지에 그려진 수채화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왠지 그 방의 학생이 그렸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밝은 색채로 그린 어느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그림의 하단에는 몇몇 낱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꽃, 태양, 하늘, 아름다움 …… 그러나 이것들이 다가 아니다. 죽음!
그림을 다 그린 뒤 이 낱말들을 하나하나 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그 학생의 모습을 떠올려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화창한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울리는 낱말과 ‘죽음’이라는 낱말의 만남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이 ‘죽음’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한지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고, 때로는 고귀하게도 합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 우리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여전히 근심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 여정에서 죽음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 삼켜 버리는 잔인한 그림자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비로소 감사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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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 11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을 맞으러 나가려고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까지 염두에 두고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늦게 왔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을 밝힐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급 차라고 해도 기름이 없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구닥다리 휴대 전화이든, 최신 ‘스마트폰’이든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쓸모없습니다. 곧 본질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좀 더 고급스럽고 화려한 등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정작 중요한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더 좋은 등’을 준비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학벌, 재산, 지위, 명예, 권력과 같은 외적인 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는지요? 등이 좋은 것만으로는 소용없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불을 계속 밝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등이라도 사랑이라는 기름, 말씀 실천이라는 기름, 성령이라는 기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닌 외적인 것들이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한다면, 구원의 불꽃이 우리 안에서 타오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가진 등보다 더 화려한 것으로 바꾸어 주십사고 청하기보다, 제 등에 맞는 기름을 넉넉히 채워 주십사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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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 11 02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러시아 노래에 우리나라 가수가 가사를 붙여 부른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복음 묵상에 웬 유행가 이야기냐고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사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
가끔 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우리는 왜 이 지구라는 별에 왔는가?” 이러한 질문에 위 가사처럼 ‘꽃을 피우려고 왔지.’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꽃은 봄이 왔다고 피는 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아낌없이 사랑할 때만 피는 꽃입니다. 백만 송이 사랑의 꽃을 피울 때 우리는 그리던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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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1 02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 속이며 살아왔다. //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 흉물 같은 내 마음을 / 나는 마치 고소 공포증 / 폐쇄 공포증 환자처럼 /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知覺)만으로도 /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 보험에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 기어(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 하느님, 맙소사!
구상 시인의 “임종 고백”(臨終告白)이라는 시입니다. 닥쳐올 죽음을 앞두고, 곧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그 본래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두렵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가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한 인간의 약하고 죄스러운 모습을 고백하는 진실성 때문입니다. 병원 사목을 하셨던 어느 신부님이 평소 약점을 보이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더 추한 모습을 보이며 죽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앗아 가는 죽음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어 사는 삶을 위해 날마다 마지막 날처럼 임종 고백을 하듯 살면 어떨지요? 자신이 가진 약점과 결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죄스러운 삶을 주님께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며 사는 것이지요. 우리 삶은 결점과 죄를 덮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점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진실함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살아 있는 꽃이 향기를 내는 것처럼 깨어 있는 삶이 아름답고 향기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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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1 02)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가 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여 밤새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를 신랑을 끝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우리도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같습니다. 똑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어떤 이는 세례를 통하여 더 주님의 말씀에 맞갖게 살고, 어떤 이는 세례 받기 전보다 오히려 더 교만하고 오만한 자세로 살아갑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결코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나둘씩 차근차근 충실하게 해 나갑니다.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을 알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 희망하는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주님의 일꾼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쁘고 떳떳한 마음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이 마침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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