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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적 유혹에 대한 대응책 묵상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
작성자이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12 조회수1,627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적 유혹을 어떻게 이길 것이냐에 대한 대응책 묵상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랑이냐?

영적 투쟁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은 늘 드러납니다.

영적투쟁 여러분들 이 악습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쉽게 알콜을 못 끊듯이 노름꾼이 쉽게 노름에서 못 헤어나듯이,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못 끊듯이 그런 악습이 있어요.

옛날로 되돌아 가려는 그런 악습이 있어요.


여러분들 아까 탕자 얘기 했지만은, 탕자가 아버지집에 와가지고 큰아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아버지가 달래는 것으로 끝나지요.

과연 그 후의 탕자는 어떻게 됐는가?

수많은 영적 서적을 읽어봐도 그 후에 탕자에 모습에 대한 묵상집은 없었어요.

저는 그런데 제가 묵상하기를 탕자는 적어도 탕자는 두 가지 산을 넘지 못했으면 다시 기어 나갔을 겁니다.


첫 번째는 주위 사람들의 대한 시선입니다.

죄의식 한동안은 아버지가 감싸 주니깐 얼떨결에 지나갔겠지요.

그런데 그다음부터 동네 돌아다니다 보면 으이그 저 새끼 저거 며칠가나 보자 아마 한달 있다가 또 기어 나갈거야.

그 사람들의 시선 챙피해서 못다니는 거에요.

그거 이겨내지 못하면 기어 나가요. 그거 이겨내는 방법은 뭐냐? 딱 한가지에요.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거 그거 붙잡고 않고 살지 못하면은 다시 탕자가 될 수 밖에 없어.


두 번째 또 어떤 벽이 있느냐?

옛날에 속했던 옛 유혹 여자들에 빠져서 흥청 망청 살았던 육에 대한 유혹 이런 것들

한 번 피정을 통해서 죽을 때까지 성인 성녀로 못살아요.

그래서 우리들의 영적 투쟁은 일회적인 영적 투쟁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적 투쟁이어야 됩니다.

사제들이라고 별 수 없어요.

사제도 끊임없이 자기 악습과 싸워야 돼.

특히 현대인들이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아주 교묘하게 사탄이 이제 그걸 가지고 정말 많은 가정을 파괴 시키고 괴롭히고 있는데, 그 영적 투쟁 가운데서

현대인들이 정말 경계해야 되고 우리 신자들이 한 번은 깊이 묵상해야 될 것이

어떤 유혹이냐? 성적유혹입니다. 성적유혹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과 그의 자식들의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성의 타락으로 불의 심판을 받았지요.

그때 의인 하나 롯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의인 롯 때문에 마누라랑 딸들은 의인은 아니었어요.

아버지 잘둔 덕에 니들 식구들은 내가 지켜주마 하면서 나가라고 했죠.

근데 조건은 뭐냐? 뒤돌아보면 안된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됐어요.

여러분들 하필이면 왜 소금기둥으로 변했을까요?

대리석으로 잘 변했으면 지금까지 잘 남아있었을텐데.

왜 해필이면 소금기둥이야?

성서에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빛을 나타냅니다.

빛 부활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쳐다보다가 굳어졌지만은 그러나 그 여인은 다시 소금으로써 세상의

짠맛으로 돌아가라 그 뜻일 겁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와이프를 잃고 딸 둘을 데리고 피했어요.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에 가지 않고 어디갔어요? 굴속으로 들어갔죠?

굴속에 들어가서 이제 은둔생활을 하는거야.


그런데 딸년 둘이 가만보니깐 세상에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이 애비 밖에 없어.

“ 야 이러다간 우린 쌩처녀로 늙어 죽겠다. ”

그래 가지고 어떡합니까? 큰 년이 먼저 그땐 년이야.

큰 딸년이 먼저 아버지를 포도주를 인사불성이 되게 먹여요.

성서에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몰랐다고 나옵니다.

아버지를 인사불성이 되게 포도주를 먹이고 나서 들어가서 간음을 하죠.

그 다음에 둘째 딸년이 똑같이 지 언니랑 같이 포도주를 먹이고 나서 지 아버지랑 자고 나와요.


그래서 생긴 자식이 뭐냐? 큰딸한테 암몬인 작은딸한테 모압인이 만들어져요.

암몬인과 모압인의 바로 조상이 근친상간 때문에 생긴 족속이에요.

바로 인류 최초의 성범죄는 근친상간이에요.

그럼 이런 근친상간이 그때만 있었고 지금은 없느냐?

천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시절에 술 먹은 아버지에게 당해요.

한평생 그 상처가지고 살아요. 어린시절 사촌오빠에게 당해요.

또 어떤 사람은 뇌성마비 남동생을 누나들 셋이서 수 십년 동안 성적으로 희롱을 해요. 있어요.

챙피하고 쉬쉬해서 말을 안할 뿐이지.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일들이 기가 막힌 일들이 많아요. 남편이 바람을 폈대.

남편의 바람의 대상자가 시어머니야. 소설 갔지요? 있어요.

어린 시절부터, 남편 고등학교 때부터 일찍 과부된 자기 시어머니가 욕정을 못 참아서 지 아들이랑 그 짓을 한거에요.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들이 많아요.


폼페이 로마제국의 그 성의 타락의 도시 그걸 발굴할 때 학자들이 얼굴을 못 들었대요. 벽화 같은 걸 보고 너무 챙피해 가지고.

앞으로 갈수록 성의 타락은 영적 생활을 집요하게 괴롭힐 겁니다.

물론 성욕 그 자체는 식욕과 같이 축복이에요.

성욕을 잘 조절 하지 못하면 음란이 되고 사탄은 그 음란을 가지고 죄에 떨어지게 합니다.

오늘 이 성적유혹을 어떻게 이길 것이냐에 대한 대응책을 한번은 묵상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에 유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누굽니까? 에집트로 팔려간 누구의 아들입니까? 야곱의 아들입니다.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가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그 관리 밑에 그 어린 시절에 몸종으로 갔다가 이 아기가 똑똑하고 그러니깐 재산을 맡깁니다.

그러고 정말 볼이 발가스름한 정말 잘생긴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나중에 읽어보세요.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어떻게 성적유혹과 싸워 이기는지 그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히 성적유혹을 극복하기는 힘겹고 어려운 유혹이지만은 요셉에 경우를 볼 때 그 유혹을 따라가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여전히 우리들한테 달려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팅 성인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 속에 자기 자신을

내버려둬서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 동의하십니까?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나약함 속에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두기 때문에 방임하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우둔한 죄인에게도 마지막에 결정 능력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의 의지까지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유혹에 떨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죠?

하와한테 요거 따 먹으면 요렇게 될거다 하는 결과를 알려줬을 뿐이지 손을 잡아가지고 사과를 까서 입에 쳐집어 넣어주진 않았어요.

결국 지가 따서 먹은건 인간입니다.


창녀집이 즐비하게 서 있어도 창녀들이 요염하게 아무리 꼬셔도 겨 들어가고 안들어가고는 내 의지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의지만큼은 못건드려요.

우둔한 인간이라도 마지막에 결정능력은 본인 자신에게 있다는 거죠.


요셉이 복숭아 볼처럼 발가스름한 잘생긴 청년으로 자라나니깐 보디발의 아내 추한년이 요셉을 꼬십니다.

늙은이가 참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집요한 성적유혹을 당합니다.

성적유혹을 물리치는 영적무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첫 번째 무기는 아주 간단 합니다. “싫습니다.” “싫습니다.”

겨우 네 단어의 불과 하지만 성적유혹을 물리치는데 이거 보다 단호한 무기는 없습니다.



유혹이나 악 앞에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행동하면 항상 당합니다.

어느 의사가 알콜 중독자에게 아예 끊으라 하지 저녁에 조금만 마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상습절도범에게 판사가 주중에는 쉬시고 주말에만 훔치시지요. 이말 안하지요. 절대 안합니다.

성적 유혹도 마찬가지죠. 적당하게 응답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 유혹의 제일 큰 것이 뭐냐? 첫 번째 단추는 “싫습니다.”

누군가가 쳐다보는 눈이 이상하고 전화가 걸려오고 “싫어요 당신 왜이래? 사람 어떻게 보고 우습게 알고 이래” 단호하게 끊어야지.

‘글쎄요. 제가 쪼금 내일 저녁때야 한가한데’ 몸을 비비꼬면서  그랬단 당해.

근데 싫습니다. 가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통하지가 않았어요.


두 번째로 어떤 영적 무기를 쓰느냐?

요셉은 두 번째 무기로 멀리합니다. 그 여인을 멀리합니다.

성적 범죄를 짓지 않으려면은 그 범죄를 하게 하는 대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불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탈 확률이 높습니까? 적습니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탈 확률이 작아집니다. 


음란잡지나 음란영화나 포르노를 보면서 ‘나는 순결해, 나는 순결해 끙끙 거려 보십시오.’

그게 순결해지나 하하하 그런거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순결할 수 있는가? 시험하는 것 자체가 등신입니다. 하하하


만일에 미사 나갔는데 어느 형제만 보면 갑자기 가슴이 뛰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

그러면 지금 뭔가 싸인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야 됩니다.

그 사람이 교중미사에 나오면은 교중미사 피하십시오.

새벽미사 가든지. 만약 그 사람이 따라 나오면은 다른 성당으로 가십시오.


성체를 모시거나 말씀을 들으러 오는게 목적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그 남자 요 미사에 왔나?, 그 여자 왔나?’ 그거부터 찾게 됩니다.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면서 유혹의 기회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촛불에다 손가락을 대면서 불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거와 똑같습니다.


사무엘 후서 11장 2절부터 보면은 다윗은 어떤 인간이었느냐?

다윗은 유혹의 기회로부터 멀어져야 될 상황이었는데 불구하고 유혹 안으로 기어들어갑니다.

2층에서 이렇게 자기 궁전에서 베란다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깐

뿅~! 뭐가 보여? 왠 여자가 홀랑 벗고 다라이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네.

세상에 죽인다 죽여. 그때 음란마귀가 들어 왔죠.

그때 다윗은 아이구 이런  내가 못볼 걸 봤구만. 멀어져야 됐어. 멀리 해야 됐어. 그 광경으로부터 그러나. 아마 그때 망원경이 없어서 그랬지.


그러면서 지 시종을 불러가지고

“야. 저 여자 누구에 아내이건 상관없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 침실로 끌고 들어와.”

시종이 알아보니깐 지금 전쟁터에 나가있는 우리야의 아내. 하 잘됐어.

이건 뭐 걸어놓은 곶감이구만. 끌어다가 간음을 했죠.

그리고 돌려보내고 나니깐 두려워. 왜? 혹시 임신하면 어떻게 되지?


그래서 그 다음번에 어떻게 합니까?

우리야를 오라고 한 다음에 너 싸움 잘해 가지고 내가 특별히 외박을 준다.

가서 니 마누라랑 자라. 근데 우리야가 어떻게 했어요?

잤어요? 안잤어요? 갑옷을 입은 채로

내 동료들이 지금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저 그렇게 못합니다.

첫 번째 작전이 실패했어. 그래서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편지를 한 장 써주죠. 이거 들고가는 이 편지를 갖고 가는 이놈을 반드시 죽여야 된다. 죽였어요.

다시 말해서 다윗은 간음죄를 덮기 위해서 무슨 죄까지 저질렀어요? 살인죄까지 저질렀어요.

다윗은 멀리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창세기 39장 10절에 나오는데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조차도 피했다. 이런 단어가 나옵니다.

시종이기 때문에 주인 마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떡하다 보면 지시도 받아야 되고

그래야 될일이 많아요. 근데 가능한 둘이 있는걸 피한거에요.

둘만 있으면 저 여자가 이상하게 뱀춤을 추면서 이상하게 혀를 낼름 거리면서 뎀비거든. 하하하


그니깐은 피했다. 아우구스팅 성인이 또 이렇게 재미난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죠?

“그러나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듯이.”

우리가 순간적으로 성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성욕이 우리 몸을 지배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잘못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시죠? 성욕은 들 수 있어요.

하다 못해 성욕이 드는 것이 시간과 때를 가려서 옵니까?

물론 전반적으로 성욕은 어두울 때 성욕은 일어나죠.

시도 때도 없어요. 요새 하도 자극적인게 많아서.

그러나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근데 이 두 가지 멀리하는 것 갖고서도 통하지가 않았어요.

그럼 이 여자가 더 적극적으로 나갑니다.

요셉의 옷을 잡아 땡겨서 침실로 끌고 갈려고 해요.

그래서 세 번째 무기를 씁니다.

세 번째 무기는 뭐냐? 도망을 칩니다.

멀리 하는 것 갖고는 안되기 때문에 도망을 칩니다.


여러분들 세상의 다른 유혹들은 저항을 해야 되지만

성적 유혹만큼은 저항 할게 아닙니다.

성적 유혹만큼은 저항하면 할수록

이 성욕이라고 하는 괴물한테 사로잡혀먹습니다.

못 이깁니다.


고린토 전서 6장 18절에 보면

“여러분은 음욕으로부터 도망치시오.”

디모테오 후서 2장 22절에 보면은

“그대는 젊음의 욕망으로부터 도망치시오.”

도망가지 않고 성적 유혹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성욕은 괴물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이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괴물과 맞설 수 있겠느냐?

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에 보면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이 기도는 유혹이 저만큼 앞에 있을 때 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한 가운데 이미 들어가 있을 때는 이 기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기도 할 시간 없습니다. 도망쳐야 됩니다.

사탄에 지금 입속에 먹히느냐 안먹히느냐 그건데.

유혹에 빠지 않게 해주시고 안됩니다.

저만큼 유혹의 징조가 보일때 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한가운데 들어와 있을 때는 도망을 쳐야 됩니다.

그래서 유혹자의 손에 그 쓸데없는 옷은 다 맡기세요.

순결의 옷을 지켜야 됩니다.


지금 내가 간단히 세 가지의 비책을 얘기했어.

요셉을 들어서

첫 번째가 싫습니다.

두 번째가 멀리하는거

세 번째가 도망치는거

그런데 이 세 가지도 네 번째의 비책이 없으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네 번째 것이 제일 중요해요.

네 번째가 뭐냐? 영적무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성적 유혹에 떨어집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불순한 마음을 잠재웁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뜨거운 욕망을 가라 앉힙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비책도 하느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없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죠.

데살로니카 전서 4장 3절에 보면은

“하느님의 뜻이란 바로 여러분의 성화입니다.”

여러분의 성화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화입니다.


지금 간단하게 지금 네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성적 유혹 이 악습으로부터 반복되는 유혹

지금 이 시대는 성적 유혹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본당에서두요.

특히 잘 명심하세요.

남녀가 같이 하는 어떤 봉사단체.

정말 조심하세요.

정말 조심하세요.


이 음욕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갑자기 봉사자들 둘이 안보여.

나중에는 들리는 얘기가

어느 모텔에서 둘이 나온다는 얘기가 내 귀에 들려옵니다.

결국에는 양쪽 집안 다 망가졌어요.

그 구역은 다 풍지박산 됐어요.

그렇게 열심한 봉사자들이서 “어쩐지 둘이 눈빛이 이상했어.”

남녀가 같이 모여서 하는 봉사단체는 항상 음란 마귀가 들끓어요.

앞에서는 둘이 봉사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둘이 한차타고 모텔가서 뒹굴다 나옵니다.

그리고도 위선자처럼 봉사 또 합니다.

정말 경계하세요.


본당에 빈센치오라든지 그런가 많잖아요. 남녀같이 하는 봉사단체

할머니들이 신부님 그거는 저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천만에 늦바람 만큼 무서운거 없어. 어~~~?!

그래서 옛말에 꺼진불도 다시 보라 그랬어~~~~ 하하하

할머니들 바람나니깐 무섭둡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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