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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9,9-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2 조회수9,29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7월 2일 금요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9,9-13)

   

1독서<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창세23,1-4.19; 24,1-8.62-67)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았다이것이 사라가 산 햇수이다.

사라는 가나안 땅 키르얏 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죽었다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물러 나와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4 “나는 이방인이며 거류민으로 여러분 곁에 살고 있습니다죽은 내 아내를 내어다 안장할 수 있게여러분 곁에 있는 묘지를 양도해 주십시오.”

19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마므레곧 헤브론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자기 아내 사라를 안장하였다.

24,1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말하였다. “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내 고향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그 종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제가 아드님을 나리께서 떠나오신 그 땅으로 데려가야 합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세월이 흘러

62 이사악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를 떠나네겝 땅에 살고 있었다. 63 저녁 무렵 이사악이 들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눈을 들어 보니낙타 떼가 오고 있었다.

64 레베카도 눈을 들어 이사악을 보고서는 얼른 낙타에서 내려,

65 그 종에게 물었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그 종이 그분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레베카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66 그 종은 이사악에게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화답송 시편 106(105),1ㄴㄷ-2.3-4.4-5(◎ 1)

◎ 주님을 찬송하여라좋으신 분이시다.

○ 주님을 찬송하여라좋으신 분이시다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주님의 위업을 누가 말하리오그 모든 찬양을 누가 전하리오

○ 행복하여라공정하게 사는 이들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주님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제가 당신께 뽑힌 이들의 행복을 보고당신 민족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며당신 소유와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9,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브라함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23,1-4.19; 24,1-8.62-67)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창세 23,2

며칠 전 큰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향에 내려갔는데, 결국 돌아가셔서 상(喪)을 치르고 장례미사와 안장(安葬)까지 보고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잃고 슬피 울었다는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큰어머니의 오열(嗚咽)이 오버랩 됩니다. 평생을 가톨릭 교인으로 사셨던 고인께서 그리스도의 품(κόλπος, 콜포스, 공동번역 요한 1,18 참조) 안에서 안식(安息)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삼일동안 제가 했던 일을 돌아보니,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식 나르고 상 치우고 문상객 신발 정리하고, 또 틈나는 대로 연도 바치러 오신 분들 틈에 섞여 함께 연도를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적어도 가톨릭 장례에 있어 이 두 가지 역할은 어느 것이 우선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과 유가족들을 위해 둘 다가 유익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큰아버지의 죽음은 여러 모로 제게 깊은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집안이 아니다 보니, 장례의 규모나 문상객 수, 하다못해 조화(弔花)의 개수까지도 다른 호실과 비교해 소박할 수밖에 없었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이것들이 마치 고인과 유가족의 삶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이해되기까지 했습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한다는 장례의 취지가 충분히 살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부모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해지더군요. 자식들도 많지 않은데다, 사회적인 성공가도(成功街道)와는 먼 삶들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은 씁쓸하고 우울한 장례식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족처럼 연민의 정으로 연도를 바치러 와주었던 고인의 성당 지인들의 훈훈한 마음은 좋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빈소 방문은 물론이고, 염(殮)과 입관 예절, 출관, 화장(火葬), 매장(埋葬) 예절까지 함께 하면서, 기도와 찬송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도시화가 덜 된 지역이라 그런지, 교우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챙기고 보살피는데 특별한 정을 쏟아 부어 주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초기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도 이러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큰아버지의 죽음은 평소 왕래가 뜸했던 먼 일가친척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인의 죽음이 공동체의 일치와 결속을 다지는 ‘생(生)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생명이 꺼진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생명력이 활발히 발산되고 있다는 오묘한 섭리 앞에서 잠시 누멘(Numen)적 감상에 젖어봅니다.

가톨릭 교리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므로,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상장예식서 시작기도 中)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도 죽음을 ‘하느님(예수님) 앞에 마주섬(encounter),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정의합니다. 신학자들은‘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으며’(묵시 1,14) 라는 묵시록의 표상을 해석하면서, 죽음 이후 인간은 인자(그리스도) 앞에서 그분 눈빛에 조명을 받아 자신의 지난 세월의 공과(功過)를 숨김없이 바라보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픈 고통의 순간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정화(purgation)의 과정(process)이 곧 연옥입니다. 심판정, 불 등의 상징적 묘사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학적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에, “과정(process)으로서의 연옥을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만나고, 모든 구속된 이들과의 전적인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장애를 불태워버리고, 각 사람을 당신의 살아있는 몸에 담그는 주님과의 만남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Zachary Hayes, Visions of a Future: A Study of Christian Eschatology, pp 110-116. 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가톨릭적 이해에서 볼 때, 죽음 이후의 삶은 분명히 있고 이 삶은 정화의 단계를 거쳐 하느님과의 보다 깊은 일치로 향하기 때문에, 죽음은 희망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가슴에 안은 채 고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연도 중 한 부분인 시편 150편 중 일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성소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시편150,1.6)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까닭과 제자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9,10) 그분께서는 죄인의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보다 죄인 취급을 받는 의지할 데 없는 ‘공적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상종하지도 않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바빌론 탈뭇 브라콧 43b).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반발한 바리사이들을 탓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 아모스는 사업상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고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단죄는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결정적으로 단죄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이시면서 회개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품으시려고 애쓰셨지만 특히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9,13)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죄로 기우는 경향 때문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후회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잘못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 허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자비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영혼의 치유자이신 그분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남의 죄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조차 참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탈을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은연중에 죄인을 공동체의 삶에서 배제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고 가혹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 실수하면 헤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들춰내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에서도 배제시키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요. 

무릇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오히려 신앙공동체에서나 사회생활 중에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회개는 가혹한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나누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배척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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