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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2 조회수621 추천수8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 윤경재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14,27-31)

 

 예전에 책에서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인지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불과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추론과 상상하는 두뇌를 지녔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최근 동물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동물들도 어느 정도 상호 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숫자도 셀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침팬지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인간의 언어도 이해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방안에 목이 좁아 손이 들어가지 않는 유리병 속에 침팬지가 좋아하는 땅콩을 넣어두고 한쪽에는 물통을 놓아두고 침팬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손을 넣어 땅콩을 꺼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침팬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만, 물통에서 물을 마셔 입에다 머금고 그 유리병에다 뱉어 물을 채우는 동작을 반복하더랍니다. 그러고 나서 땅콩이 물에 떠올라 손가락에 닿자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즉 침팬지도 인간 못지않게 자신의 행위와 사물의 인과관계에 추론과 인식을 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에 문화 인류학자들은 새로운 설명을 전개합니다. 여타 동물에 비해 인간만이 감탄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육아 방법에서 “인간의 어머니는 아이가 작은 변화를 보일 때마다 끊임없이 감탄하며 그 결과 변화를 반복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우리가 인간이 된 것은 엄마의 감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감탄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누구로부터 감탄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설명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라고 축복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은 감탄할 줄 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사흗날부터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엿샛날에는 “참 좋았다.”라고 더욱 감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뻐하고 감탄하실 줄 아는 특성을 지니셨는데 그 특성을 인간에게만 주셨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자연과 예술을 통해 감탄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갑니다. 이러한 정서적 경험을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숭고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입이 쩍 벌어지게 하는 엄청난 자연의 풍광 앞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나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벅찬 느낌을 그저 숨 막히도록 감탄할 뿐입니다. 이 숭고함, 혹은 장엄함의 경험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숭고함이나 장엄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는 무한한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예술적, 종교적 경험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이라는 궁극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여러 표징을 통해 제자들과 사람들을 경탄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롭고 놀라운 하느님의 선물을 주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것도 아빠 하느님께서 미래에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선물로 주십니다. 그 평화는 종말의 선취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의 교제 속에서 현재화하는 평화를 예수님과 교제하는 제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선물로 내놓으십니다. 이 평화는 제자들 안에 싹트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 오해와 무지를 몰아낼 것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머무르는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진리의 성령(파라클레토스)께서 주시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시되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는 분이신 성령을 통해 세상과 다른 평화를 주셨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다른 유다(유다 타대오)가 한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비로소 나왔습니다. ‘현재에 이루어지는 종말’인 평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화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선물로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제는 언제나 상대방이 있는 것입니다. 한쪽이 열려 있더라는 다른 쪽이 문을 걸어 잠그면 교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짜로 주는 선물이더라도 거절하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늘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생활하시고 경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10,21)  

 이처럼 경탄과 평화는 하느님과 주님께서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경탄과 평화를 실컷 누리고 나누며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낙심하고 두려워할 겨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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