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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52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1 조회수411 추천수5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묵상에 앞서 CBS의 노컷뉴스에서 반가운 기사가 있어 이 기사의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일부를 펌하여 그대로 소개합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르단 방문 이틀째인 9일 오후 후세인 모스크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는 오해로 얼룩진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있지만, 이제는 신을 충실히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상대를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이어 "화합의 디딤돌이어야 하는 종교가 때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목적 등으로 대립과 분열, 심지어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강제하려는 상황이 벌어질수록 참된 신앙과 원칙의 필요를 절감한다"고 말했다.]

오늘 묵상은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하신 이 말씀으로 묵상의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이제 떠나지만 너희가 내 가르침을 따른다면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는 오늘 말씀을 불가의 금강경에서는 부처를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를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형(形)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형에 머물지 마라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으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는 말씀 등 일 것입니다.

재물 등 이런 모든 상 등을 가리켜 금강경에서는 이를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 하며 이런 것은 모두 허망하다 하여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치를 깨닫는 것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라 하며 그래야 부처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즉견여래(卽見如來)입니다. 이처럼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등 이렇게 네 구절로 된 이런 가르침을 사구게(四句偈)라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위 루카 복음서 말씀도 이런 사구게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즉견여래(卽見如來)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부단한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우리 신앙은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런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주는 신앙이며 이는 바로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사상을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게 표현한 노래 말은 저는 우리 찬송가 노래 말이 아니라 러시아의 가곡 '백만송이 장미'를 우리말로 번안한 노래 말을 꼽겠습니다. 러시아는 동방 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동로마 제국의 쌍독수리 문양을 국가 문양으로 사용하는 국가이므로 요한 복음서를 축약하여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러시아 정교회 교회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은 보통 2시간이 넘습니다. 2-3시간 동안을 서서 미사를 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미사를 드려야 하므로 보통 신심이 없으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러시아 하바로스크에서 딱 한번 미사 드리는 광경을 목격하여 그 성당만 의자가 없는 성당으로 알고 있었으나 지난주에 용산 참사현장인 남일당 건물의 노천성당 본당신부로 부임하시고, 문 정현 신부님을 보좌로 두신 이 강서 신부님께서 사석에서 알려주셔서 그 당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신 노인 분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당 밖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령을 보호자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에 그 외의 것을 성령께서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이제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은 모두 알려주었으므로 "내 이름으로,"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켜주는 보호자 였다면 앞으로는 성령께서 예수님의 몫을 다 해 주신다는 말씀이고, 육신의 형상을 지닌 예수님에서 이제 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하신 말씀을 강조하고 중복을 피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떤 배움에 대하여 별 의미를 갖지 않고 잊고 있었으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의미가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중학교 때에 의미 없이 외웠던 격언에 대하여 지금에서야 그 교훈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시 유대민족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하거나 어떤 주재자가 있어서 이를 주관하여야 한다는 피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율의지와 잠재의식을 생각하지 못한 이런 민중들에게 우리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전부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그 계시를 받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자율의지나 잠재의식 등 이런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알려 주기 위해서는 중간단계를 필히 거쳐야 합니다. 그 중간단계는 구약에는 전혀 언급된 바 없는 예수님이 새로운 개념으로 도입한 개념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타성에서 일정 부분 해방시켜주고,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도 이런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던 제자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 차차 이를 깨달게 될 것이므로 그 일을 하는 주재자를 성령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계시가 없더라도 내 가르침을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실천하는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자율의지를 고양시키고 능동적으로 변해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성령을 새롭게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여 이를 행하도록 명령하는 우리 양심이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최상의 영감입니다. 성령을 우리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느님은 GPS 위성으로, 성령은 이를 수신하여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으로, 그리고 우리는 네비게이션을 보고 운전하는 운자자로 알기 쉽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수동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여 이를 실천하는 것에 모두 종속되므로 저는 이런 개념에 대하여는 연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으로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마침기도는 ‘백만송이 장미’의 노래 말을 요한 복음서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음미해 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후렴)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 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낸 그런 사랑 나는 알았네. (*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후렴)

이제는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 온 그토록 기다리는 이인데
그대와 나함께하면 더욱 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되는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알레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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