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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51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0 조회수378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알려주신 말씀은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당신은 참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라 하였습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는 일체일 수밖에 없으므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 30) 하셨으며 예수님과 우리는 또 일체이므로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하나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이는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수의 원천이며 예수님은 그 생명수의 우물이며 우리가 그 우물 물을 먹고 살아간다면 영원한 생명수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그 우물인 예수님 그리고 그 우물 물을 먹는 저희는 '영원한 생명수'의 관계 속에 있으므로 하나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우물 물을 먹지 않고 야곱의 우물을 먹는 자는 누구나 목 마를 것이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물 물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고 '사마리안의 여인과 대화'(요한 4,13-14)에서 이미 알려 준 내용을 오늘은 표현을 달리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상기시켜 준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수의 우물 물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성체로 영하고 있으나 성체를 영하는 것은 곧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말씀을 모시는 것이므로 이렇게 사고의 전환을 한다면 미사에 참례하여 강론을 경청한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말씀을 모셨으므로 말씀을 상징하는 성체를 차별 없이 모두가 모셔야 더 합리적일 수 있으며 예수님은 이를 더 반기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신 참포도나무는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지체인 가지를 스스로 잘라내어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포도나무를 관리하는 하느님이신 농부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접할 때마다 생각나는 복음은 '무화과나무의 저주' (마르 12, 12-14; 마태 21,18-19)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시여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아직 철이 아니어서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철이 아니어서 열매가 열리지 않은 무화과나무에게 저주를 보내어 말라죽게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으면 응징과 심판으로 상징되는 구약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초기 신앙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으므로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할까요?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공관복음서인 루카복음서에서는 이 내용을 아예 빼 버렸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오늘 복음인 참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과 우리는 한그루의 참포도나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우리 그리스도교 사상이 한 단계 더 발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를 우리는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중시하는 신앙관도 있으며 오늘 복음인 '참포도나무의 비유'를 중시하는 신앙도 있습니다. 전자는 응징을 수반하는 지배 중심의 사고로, 후자는 공존을 중시하는 상생의 사고로 발전할 것입니다. 또 전자는 중세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관이며 후자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이성적 신앙관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은 이런 두 모습이 양존하는 과도기적 상태에 있으므로 사실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교리대로 복음을 그대로 강론하신 신부님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요즘은 육신의 부활로 강론하지 않고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론하십니다. 이는 중세 같으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교회의 장상부터 이런 의미로 강론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육신의 부활을 믿는 중세 교리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 자기모순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진리의 가르침을 전해 줄 수 있을지, 우리 교회는 이제 이런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에는 또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이러한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 줄 것으로 믿고 지금도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교회에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이 말씀은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 한 가지,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여 이를 실천하는 일 밖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고 기도하면 무조건 다 들어준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실천한 후에 부자 되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여도 예수님은 그런 기도는 절대 들어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자 되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는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외의 기도는 아빠 하느님이 절대로 우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좋은 인연을 많이 쌓아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선인선과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저희는 그 지체입니다.
그 지체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참포도나무가 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지체는 농부이신 하느님이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일을 인간들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올바르게 깨우쳐 주시고
하느님의 생명수인 예수님의 우물 물을 먹고 자라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저희 모두가 좋은 인연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언제나 저희를 생명의 우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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