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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승리를 부르는 말씀 (최기산 주교님 ) 을 읽고...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12 조회수471 추천수1 반대(0) 신고

승리를 부르는 말씀을 읽고..


책을 읽고 마음에 닿은 성경말씀과 글을 적어봅니다.


욥기

 욥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용기를 얻는다. 욥기를 통해서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 낼 때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다. 나쁜 짓을 하고 사는 사람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의롭게 사는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 때 생기는 의문이다. 하느님은 그 고통을 즐기고 계실까? 왜 가만 보고만 계시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도 계속된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오늘에도 중요한 인생의 해답서로 다가온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욥’은 고통당하는 자, 혹은 울부짖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욥은 고난 속에서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우리도 고통 중에는 몸서리치며 울부짖을 때가 있다. 절망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절망은 안 된다. 어떤 이는 ‘욥’의 의미가 미움 받은 자, 혹은 회개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설명하는 데 그 또한 그럴싸하다. 욥은 미움 받은 자처럼 혹독한 고통을 당한다. 그는 고통 앞에서도 좌절보다는 하느님을 의지하면서 하느님께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해답을 얻는다. 우리도 고통, 십자가를 통해서 아무 것도 없는 가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체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2.5-6).


 욥은 자신의 고통 중에 가졌던 부족한 신앙과 불평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한다.

 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더욱 큰 믿음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고통 중에 살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하느님조차 고통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욥도 고통 중에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고통만을 바라보고, 고통만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통 중이라 해도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후기

 요즘도 자신에게 혹은 가정에 큰 재난이 닥쳐오면 어떤 이들은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 벌을 받는가?”라며 한탄한다. 이러한 사고는 유다인들이 가졌던 사고이며 잘못된 사고이다. 고통은 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은총의 도구일 수 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험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시험을 잘 보아야 우등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고통들은 자신의 잘못의 결과일 수도 있다. 매일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사람이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하다. 과식도 마찬가지다. 과음과 과식을 하면서도 고통을 왜 하느님께서 주시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해서는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고통이 내게 밀려와도 욥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우린 승리하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고통으로 울부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욥처럼 솔직하게 울부짖으면 된다. 욥은 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신처럼 완벽한 인간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오는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완벽한 척하고 벽을  쌓고 있으면 어찌 주님의 은총이 들어갈 자리가 있겠는가!


주님, [...]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

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시편 139,1-2.7-8).


 요즘은 몰래 카메라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나를 살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밤중에도 볼 수 있는 투시경이 발달하여 어둠 속에서도 적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다. 그러나 아직은 인간이 만든 것들이 완전하지 못하다. 모퉁이에 가서 있거나 두꺼운 옷을 가리고 지나가면 몰래 카메라를 따돌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따돌릴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에 있던 어떤 위장을 했건 어디에 숨었건 다 투시하는 눈을 가지셨다. 그분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밤중에 나 혼자 한 일도 그분은 다 아신다. 다 보고 계신다. 더구나 우리의 생각까지도 다 아신다고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피해 갈 곳이 없다.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은 계시고 저 승, 곧 죽어서 땅에 묻혀 있어도 아시고, 연옥에 가면 거기도 계시고 천국에 가면 거기도 계신다.

 그분은 전지하시고, 무량하시어 어디에든 다 계시고, 전능하시어 무엇이건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매사를 조심해서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


코헬렛

 과거에는 전도서라고 불렀다. 전도자(설교자)가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다. 그래서 이 번역서에는 코헬렛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저자가 누구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솔로몬이 저자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자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질문한다. 이것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넘친다 해도 하느님의 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새 발의 피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때대로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 코헬렛은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을, 소위 별 볼 일 없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즐기며 살아야 하는데, 즐기며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쾌락주의에 빠지라는 것은 아니며, 하느님 없이 즐겨봤자 결국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얼굴을 좋게도 나쁘게도 바꿔 놓는

다. 행복에 싸인 마음의 기운은 밝은 얼굴에 나타난다(집회

13,25-26).


사람은 외모로 그 됨됨이를 알고 사려 깊은 사람은 얼굴

을 대하면 알게 된다. 사람은 옷차림과 큰 웃음과 걸음걸이

로 그 인품을 드러낸다(집회 19,29-30).


허리가 굽은 채로 흔들흔들 걸으면 채신머리없다고 말한다. 허리를 곧게 펴고 힘차게 걷는 사람은 힘차 보인다. 그러므로 성공을 하고 싶은 사람은 곧게 서서 똑바로 걷는 모습이 필요하다. 너무 고개를 들고 걸으면 교만해 보이고 너무 숙이면 비열해 보인다.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의 지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을 보면 아픈 사람인지 건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옷차림을 통해서도 그 사람을 알아보게 된다. 빨간 옷만 너무 좋아하면 몹시 정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좀 경계하게 될 것이다. 너무 하얀 것만 좋아해도 좀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러므로 적당하게 섞어서 입는 것이 조화로울 것이다. 웃음으로도 인간을 평가하게 된다. 언제나 평화롭게 웃는 얼굴로 남을 대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장사를 해도 잘될 것이다. 곧바로 힘차게 걸으며 남자는 호탕하게, 여자는 살포시 웃는다면 많은 이웃을 얻게 되고 성공 할 것이다.


제 생명의 하느님이신 아버지 주님 저에게 오만한 눈길을

허락하지 마시고 제게서 욕망을 멀리하여 주소서. 식욕과 색

욕이 저를 지배하지 말게 하시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욕정에

저를 넘기지 마소서(집회 23,4-6).


우리도 기도할 때 감히 하느님 앞에 오만치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많은욕망이 있다. 식욕과 색욕은 기본적인 욕망이다.

이 욕망들이 사라진다면 어찌 사람이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이런 욕망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욕망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술은 알맞게 마시면 사람들에게 생기를 준다. 술 없는 인

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술은 처음부터 흥을 위해 창조되

었다. 제때에 술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은 마음이 즐거워

지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술을 지나치게 마신 자는 기분이

상하고 흥분하여 남들과 싸우게 된다(집회 31,27-29).


 역사 이래 술이 없던 시대가 있었는가? 술은 좋은 음식이다. 그래서 저자는 술 없는 인생이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술이 없는 잔치, 생각만 해도 힘이 든다. 과음은 언제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말이 많아지고, 때로는 욕설이 난무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신 뒤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욕을 보는 경우도 있다. 술 때문에 너무나 많은 가정이 고통을 호소 하고 있다. 절주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아무리 술이 좋다 해도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면 아주 없애 버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적당히 마시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한 부분일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영은 살아 있으리라. 그들의 희

망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분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경외

하는 이는 아무것도 겁내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그의 희망이

시니 무서울 것이 없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의 영혼은 행복

하다(집회 34,14-17).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두려워함이다. 무서워함이다. 하느님이 두렵다고 생각하면 나쁜 짓을 못한다. 그것이 축복이다.




“과”자가 들어가는 말은 다 좋지 않다. 과음, 과식, 과욕, 과속 등등이다. 많은 경우에 과식으로부터 병은 시작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숨이 가빠지고 그것을 다 소화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계속 과식하면 결과는 좋지 않아진다.

병이 들면 어떻게 할까? 집회서는 말한다. 첫째, 지체치 말고 기도할 것. 둘째, 죄악에서 해방될 것. 셋째, 의사에게 맡길 것. ‘명답이다. 우린 기도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죄악에서 해방되는 것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영혼이 치유되고 마음이 치유되고 나서 육신은 치유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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