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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 12일 야곱의 우물- 요한 20, 1-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12 조회수544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1-­9)
 
 
 
 
주간 첫날,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의 발걸음이 빠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한 무덤으로 가는 길입니다(1절). 복음사가들은 이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합니다.
마르코는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마르 16,1-­2)라고 전합니다. 한편 마태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마태 28,1)라고 하고, 루카는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 24,1)라고 묘사합니다.

루카복음에서 ‘그 여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23,55)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안장한 무덤으로 갔다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명, 세 명, 또는 둘 이상 다수의 여인이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마리아 막달레나’로만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그 여자들’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쓴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것일까요?

그런데 이 여인은 이날 아침 왜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요? 마르코와 루카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간 것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안장하기 전에 이미 몰약과 침향을 가져다 시신에 바르고 아마포로 감쌌다고 말합니다(요한 19,38-­40 참조). 그렇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비극적 죽음 때문에 깊은 슬픔에 잠겨 밤새 잠 못 이루다 아침 일찍 깨어 무작정 그곳으로 향한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그분을 모신 곳에 가서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그분 시신 곁에서나마 지키고 싶어서 그곳으로 달려간 것일까요?

무덤 앞으로 달려간 그녀의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크게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마리아는 무덤에 들어갈 용기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했던 제자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요한 20,2). 무덤 앞의 돌이 치워지고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은 뒤에서 “왜 우느냐?”는 천사들의 물음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기도 합니다(13절).
 
혼란과 두려움에 싸인 마리아는 뒤에 서 있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지 몰라보고 동산지기로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그분을 찾는 그녀의 애타는 마음은 사랑하는 임을 찾아 헤매는 신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아가 3,2­-3) 루카는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묘사합니다. 무덤 앞에 선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하고 말합니다.
 
혼란과 긴장감이 흐릅니다. 무덤 입구는 열려 있고 예수님은 그곳에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경주를 하듯 달려갑니다(요한 20,4).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않고 무덤 밖에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5절). 뒤따라온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수의가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습니다(7절).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9절).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구약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을 터였습니다. 빈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이를 말해줍니다(11절). 빈 무덤은 슬픔과 좌절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분이 진정 구약의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를 향해 가는 예수님의 두 제자는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스승이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시자 실의와 낙담에 빠집니다. 그분의 죽음도 그저 다른 모든 이의 죽음과 같은 것, 아니 보통 사람들의 죽음보다 못한 헛되고 무의미한 비극적인 죽음으로 알고 슬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루카 24,17.25­-27)
 
이때 베드로에 뒤이어 다른 제자가 들어가서 보고 믿습니다(8절). 여기 8절과 앞의 5절에서 ‘보다’라는 말은 서로 다른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요. 이 제자가 처음 무덤 밖에서 ‘보았을 때’ 사용된 단어는 그리스어 ‘블레포’로, 이는 밖에서 드러난 상황을 보는 것에 주로 쓰입니다. 그러나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을 때’에 쓰인 말은 ‘호라오’로 이는 통찰력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가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는 표현에서 ‘보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를 이어주며 하나로 통합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 제자의 믿음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겉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까지 보게 하며 깨달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굳이 필요치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을 보지 않고도 그분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제자는 자기들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10절).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 날이 밝으려 합니다. 당신 계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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