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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독서 (예레26,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3 조회수1,602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독서 (예레26,1-9)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4-6)

 

4-6절은 예레미야에게 선포하라고 일러주신 경고 말씀의 요지 밝힌다.

그 가운데 4절과 5절은 접속사 '임'(im)으로 시작하는 가정문으로서,

귀결절인 6절과 연결된다.

 

즉 4-5절은 남부 유다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범죄를 할 경우를 가정하며, 6절은 이에 대해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이와같은 가정문은 남부 유다 백성에게 여전히 회개할 기회 및

주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멸망을 피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을 듣다' 라는 의미로 번역된 '티쉬메우'(thyshimeu)의 원형

'샤마으'(shamah)는 기본적으로 '듣다' 라는 의미이나, 본문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로써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순종한다는 뉘앙스까지

함축하고 있다.

 

사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우선된 사항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한 당신의 말씀을, 그들이 경청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에 '내 법대로' 에 해당하는 '뻬토라티'(bethorathi)의 원형은 '토라'(thorah)로서

모세를 통해 내려 주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 지칭한다(탈출24,12).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소유격은 율법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고 있다.

쉽게 무시하거나 여겨도 되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하느님의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 앞에 세어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그 내용을 늘 가까이 하여

배우고 깨달아 실천하도록 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잘되도록 베푸신 축복의 방편인데(신명10,13),

사실상 그들은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실천하기를 원치 않았다.

 

남부 유다의 16대 왕 요시야 성전을 수리하던 중,

그동안 사라졌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읽은 후에, 자기 옷을 찢으면서

자기 백성과 민족의 죄악에 대해 통탄해 마지 않았다(2열왕22,11.19).

이것은 그동안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났으며,

율법의 말씀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율법의 말씀이 그것도 우연하게 발견되기까지,

율법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도 남부 유다 백성들은 이렇게 발견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켜

그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율법의 말씀을 버리고 죄악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호야킴 즉위 때에 예레미야를 통해 남부 유다 백성이 이렇듯 계속해서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자행하면, 그들을 영원한 치욕거리로 만들어 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그의 종 예언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실 경우 당신 백성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탈출20,19).

따라서 주님께서는 모세 때부터 계속해서 당신을 대신하는 여러 예언자들을 세우시고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보내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백성들에게 나아가는 것이며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곧 주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죄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예언자를 그 백성이 거부한 것은

그때까지 그들이 예언자들에 대해 보여왔던 반역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표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예언자까지 배척한 그들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

마침내 B.C.586년에 바빌론을 통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다.

그와 동시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활동을 마무리하게 되었고, 그 후로 에즈라 등

귀환기의 예언자가 나타나기까지, 예언자를 통해 전파되는 주님의 말씀을

최소한 남부 유다 땅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6)

 

본절은 남부 유다 백성이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경우,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과거 실로처럼 완전히 멸망시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최후의 통첩이다.

 

여기에서 '이 집' 에 해당하는 '합바이트 핫제'(habbaith haze)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가리키시는 표현으로서,

성전에 대한 정서적 친밀성을 암시한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처소이지만,

그곳이 주님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지 않고,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장소로 사용되거나

우상이 창궐하면 주님께서는 그곳을 기필코 버리실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신축되기 전, 오래동안 계약궤가 머물러 있던

실로가 파괴된 것에서 이미 확인되었다(시편78,60-61).

실로는 하느님의 계약의 상징인 계약궤가 모셔진 거룩한 장소였지만,

B.C.1050년경 필리스티아의 침공으로 완전히 파멸되었다.

그리고 실로는 그후 다시 건축되었지만, 또 다시 파괴되었다.

 

예레미야 예언자 당시에 그곳은 폐허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이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및 그 성전의 파멸 예언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도성은 오직 주님을 섬기는 성으로 선택 받았기에(신명12,5),

그 거주민들은 주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면서, 이방 사람들이 주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사제직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탈출19,5.6).

 

그러나 과거로부터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는 현재까지, 그들은 주님께서 간택한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성별된) 삶을 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주변 이방으로부터 우상을 수입해 섬기며,

주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정체성을 주변 민족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못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 주변 민족들에게 저주와 조롱을 당하게 된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57)

 

아~~ 왜 몰라줄까?  '내가 나 임을' 왜 몰라줄까?

여러분은 아세요?  정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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