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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09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7 조회수42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만을 가지고 묵상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많은 복음이므로 오늘 복음의 앞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말씀하시기 전에 남이 죄를 짓도록 원인제공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죄를 지으면 단둘이 만나 조용히 타일러라 하셨으며, 타일러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세리와 창녀처럼 여겨라 하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의 과정에서 베드로사도는 오늘 복음처럼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막연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타일러라 하시며 용서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셨으나 베드로사도는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며 용서의 횟수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한 번은 용서해 줄 수 있어도 두 번, 세 번씩 반복하여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이 자희들이므로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사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하셨습니다. 아마 베드로사도가 백 번을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셨다면 거기서 열 배를 더 용서하고 한번을 더 용서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는  횟수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기 전에 그런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도록 타일러라 하셨으며 그래도 잘못을 반성하지 않으면 세리와 창녀처럼 불쌍히 여겨라 하신 앞 복음말씀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여야 하지만 아직은 앞 말씀과 오늘 말씀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6,12) 황금률을 다시 설명하신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말씀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는 말씀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저희에게 황금률과 자비로 말씀 전체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순간순간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 죄를 전부 용서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나'라는 我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나'라는 아상이 없으면 용서할 我가 없기 때문에 천번 만번이라도 용서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의 전제조건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한다하여 육신의 죽음으로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으므로 이런 표현도 사실 염려됩니다. 우리의 영적세계는 우리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즉, 언어가 단절된 상태임에도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경전에는 그처럼 많은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가 단절된 세계를 언어로 기록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자의 함정에 빠져있으므로 성경의 해석만큼 어려운 해석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해석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며 오직 각자의 눈높이에서 영적 양식을 섭취하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용서는 용서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약속을 매일 어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를 생각하면 이 또한 제 언어능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나를 구분할 수 없듯이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오직 반성만 있을 뿐이며 용서할 대상도 없으므로 용서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될 것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이 용서하라 하셨다하여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앙금을 버려야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것이므로 용서는 내 자신의 수양에 관한 문제입니다. 용서는 자비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결과이므로 자비가 없이는 용서는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용서는 관용이 아니라 자비의 척도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말씀하시기 전에 남이 죄를 짓도록 원인제공을 하지 말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단둘이 만나 조용히 타일러라 하신 말씀, 타일러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세리와 창녀처럼 측은히 여겨라 하신 말씀들은 모두 자비로 수렴되고 있음을 이제야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라는 단어조차도 모두 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만을 아시며 용서라는 단어를 모르시기 때문에 저희에게 늘 자비만을 베풀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저의 죄를 언제나 자비로 덮어주시고 계시므로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며, 저는 용서를 구할 일만 무수히 남아 있으며 다른 사람이 제게 잘못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 하나도 없으므로 용서의 자비를 베푸는 그런 기쁨도 누릴 수 없으므로 용서의 자비를 베푸는 분을 부러워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의 용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득이 제게 잘못한 이는 단 한사람도 없으며
모든 것은 제 탓으로 늘 반성하겠습니다. 
이 길만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으므로
언제나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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