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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 2, 13-25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5 조회수435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 2,13-­25)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거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불순명한 아담과 하와 이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령과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따라 살았기에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있고 삶의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모든 불의와 탐욕과 악의가 가득하고 욕심 ·살인·분쟁·미움 등의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법과 제도를 바꾸어 놓아도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가정도 사회도 세상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조상 대대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정기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에 빈손으로 성전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집에서부터 흠 없고 깨끗한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의 마음은 부요해지기 시작했고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집에서부터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좀더 편리하고 쉽게 예배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은 편리를 추구하는 심리를 이용해 자기들의 세속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장사꾼들을 성전에 끌어들였습니다.
제물은 제사장들의 합격 판정을 받아야 제단에 봉헌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사꾼들은 자릿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뇌물 거래와 부패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편리주의와 제사장들의 세속주의, 장사꾼들의 상업주의가 예루살렘 성전을 시끄러운 장터로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의미보다 양을 잡아 드리는 외적 행사에 더 치우쳐 성전의 본뜻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인 교회에 마음을 많이 기울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는 건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건물인 성전에서 마음의 성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건물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이며(요한 2,13-­17), 두 번째 단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으로 내보일 마음의 성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2,18-­22). 곧 구약의 건물 성전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신약의 마음의 성전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성전 안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로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채찍을 만드시어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2,16)고 책망하시며 그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음식을 깨끗한 그릇에 담습니다. 지저분한 그릇에 담긴 음식은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저분한 그릇에서 병균이 오염되었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 꽉 찬 곳에는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려면 내 안의 더러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인류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를 그르쳤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더러워져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령이 임하시는 성전으로 바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전은 어떠합니까?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신데 내가 주인인 양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내 기분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던 유다인들처럼 편리주의를 추구하고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것과 꼭 같습니다. 마음을 다해 예물을 준비하기보다는 적당히 대충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미사 참례를 한다면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채 타성에 젖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셈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정화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이 되길 원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2,19)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쓸모없게 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신 것은 당신께서 몸소 다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바로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성전이 성전답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는 온갖 장사꾼이 활개를 치고 있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세속화되고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파리와 벌이 꽃에 앉아 꿀을 먹습니다. 파리는 꿀을 먹고도 본성이 이끄는 더러운 곳에 날아가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꿀벌은 꿀을 안고 자기 집으로 날아가 꿀을 저장합니다. 내 마음이 청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복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닌 것은 쫓아내고, 물질에 대한 욕심은 쏟아버리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엎어버려 하느님이 계실 수 없는 성전을 허물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거처하시기를 원하셨던 그 상태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편리주의와 상업주의와 세속주의를 우리의 힘으로는 추방할 수 없기에 세상의 모든 욕구를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합시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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