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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발적 나눔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2 조회수539 추천수6 반대(0) 신고
 
 

자발적 나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19-31)

 

  제가 정말 존경하는 교우분이 계십니다. 대학에서 국제 경제학을 담당하시는 경제학박사 교수이십니다. 이분과 성서못자리 공부를 오랫동안 함께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루카 복음서 16장 대목을 묵상하며 이 대목에서 자신이 학문적으로나 신앙 면에서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국제 경제에 관해 연구하고 돌아와 강단에서 강의를 하였답니다. 세례와 입교는 미국에서 했지만 한 동안 게을리 했다가 어떤 계기가 생겨 신앙에 불붙기 시작했답니다. 몇 년 전부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행 개방 시장경제 체제로는 어떤 한계점에 봉착할 것이라는 예견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루카복음 16장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은 현재 전 세계가 겪는 금융 위기로 촉발된 실물경기 침체를 몇 년 전 묵상 나눔 시간에 예측하였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곳에서 문제점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문제가 전 경제시스템을 공황에 빠트릴 수 있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현행 시장경제 체제는 최대의 능률을 위해 자본의 집중과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 위험한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은 이익을 위해 과잉생산을 유발하고 과잉생산은 또 자원의 낭비와 비효율적 소비를 가져와 분배를 왜곡할 위험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투기가 끼어들 소지가 높다는 것입니다. 또 자본과 경제 운용자들의 욕심이 지나쳐 재화를 싹쓸이하듯 빨아들인다면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그 결과로 대중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심리적 빈곤이 커질 것이며, 실제 구매력 저하가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가진 자들과 경제 주체들이 한계를 모르는 욕심을 추구하면 언젠가 덫이 되어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때는 반신반의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예측이 꼭 맞아 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 체제는 애당초 고려 대상이 될 수 없겠고, 초기 자본주의를 건실하게 성숙시킨 청교도 정신도 필요하지만 그 그릇이 작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이 형제께서는 이제 어떤 정신의 자각보다는 영의 회개가 필요한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정신은 인간성 내지 도덕성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성 또는 도덕적 양심에만 맡기기엔 경제 시스템의 크기가 너무 커졌다는 말입니다. 근본적 회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루카 16,9)

  사실 재물은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그 자체에 선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의롭게 쓰느냐 아니면 불의하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근면성으로 재물을 열심히 벌었다면 그것으로 친구를 만드는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친구는 서로 관심을 보여주고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릅니다. 종이 아니라 평등한 마음을 지니고 함께 사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빈부귀천을 넘어서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래서 함께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차지하라고 주시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므로, 너희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가 없을 것이다.”(신명 15,4) 

‘너희 가운데 가난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결국 우리더러 그렇게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복된 땅을 상속 재산으로 주셨으니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정신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영의 회개만이 실천할 힘을 줍니다. 영은 우리가 한 형제요 친구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도 네 편 내 편을 가릅니다. 조건을 내세웁니다. 영은 조건이 없습니다. 영을 아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주셨듯이 우리도 무상으로 필요한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 형제님은 우리가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각자가 ‘자발적 나눔’을 실천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루카복음 16장 ‘약은 집사의 비유’와 ‘부자와 라자로 예화’에서 깨달았다고 묵상하십니다. ‘자발적 나눔’에는 객관적인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구는 가난하니 덜 내고 누구는 부자이니 더 내고 하는 것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자각으로 자발적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십일조의 수학적 개념도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0%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가 전 재산을 봉헌했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전 재화와 재능을 내어 놓을 각오를 하여야 한다고 묵상하십니다. 내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정신이 바로 루카의 영성이며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묵상하십니다. 그리고 묵묵히 실천하십니다. 이런 내용으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랍니다.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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