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박기석 신부 / 제8강 마르 1,12-15, 갈릴래아 전도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7 조회수1,890 추천수1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 / 제8장 마르 1,12-15, 갈릴래아 전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지난 시간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까지 함께 보았습니다. 오늘은 1,12절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신 부분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과 함께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렸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의 성령의 임하심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 그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즉시.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곧바로 즉시, 그리고 즉시, 그리고 곧바로라고 하는 표현과 함께 예수님을 어떤 모호함, 막연함 없이 바로 보냈다. 같은 장면을 전해주는 마태오나 루카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 성령의 인도로 가셨다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쓰는데, 마르코는 내보내다, 내쫓기다라는 강한 동사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내보내다'라는 의미가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마르 1,34) 그러니까 마르코만이 더러운 악령을 쫓아낸다는 의미로 이 동사를 쓰고 있거든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명을 지키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좇으세요.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창세 3,24)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신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내보내다, 내쫓다'의 의미를 이렇게 알아들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즉, 같은 동사를 예수님께 적용함으로써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와는 예수님이 다른 분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게 마르코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어서 쫓겨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더 큰 능력을 지시신 분'으로 앞으로 마귀들을 내쫓아내실 분, 즉 구마 행위를 통해 '더 큰 능력', 예수님의 더 큰 능력이 뭐냐 하면 악령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는 분 ⇒ 마귀를 내보내시는 분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내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악령들이 지배하던 세상을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제 행사하신다. 하느님의 세상이 된다. 그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다. 악령을 내쫓는다의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는 거죠. 즉,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보내진 예수님은 죄로 인해 쫓겨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마귀를 내보내시는 분으로 이렇게 언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용어가 탈출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광야로 쫓겨났죠. "정녕 그는 강한 손에 밀려 그들을 내보낼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 그가 자기 땅에서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탈출 6,1) 해방, 탈출해서 광야로 갔는데 어떻게 보면 광야로 내쫓긴 거예요. "그런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이곳에서 내보낼 것이다.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아예 너희를 모조리 이곳에서 내쫓을 것이다."(탈출 11,1) 그리고 40년을 헤매지 않습니까? 광야로 내보내졌다. 

 

그런데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장소였습니까? 유혹의 장소였어요. 불평했고, 배고프다고 먹을 거 달라고 그랬고, 목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했어요. 물론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 물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3일이면 갈 하느님이 약속한 땅을 40년을 헤맸어요.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앙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걸었던 길을 되풀이 하심으로써 그들이 과오와  잘못을 저지른 바로 그곳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시는 분, 악령을 이겨내시는 분, 사탄으로부터 승리하시는 분.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 이것이 마르코의 의도였다는 겁니다. 사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표현, 같은 장면의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의 40일 광야 체험을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 마태 4,1-11 ; 루카 4,1-13 

 

우리가 사순절 첫 번째 주일 날 듣게 되는 복음인데요. 세 가지 유혹이, 첫 번째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었고,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보라는 유혹이었고, 세 번째는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며 사탄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 세 가지 유혹 

1.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

2.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보아라.'

3.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사탄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그런데 순서는 마태오와 루카가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좀 바꾸죠. 지금 마르코에는 이 세 가지 유혹이 전혀 언급이 안 돼요. 간단하게만 얘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마르코 복음에서 전해주는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이 전해 의미가 없는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큰 유혹이 있었다는 얘기예요. 예수님이 사탄과의 대결에서 큰 전투를 치루신 거예요. 그걸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사십 일 동안' 이라고 하는 표현을 써요. 곧 사십 일 내내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이 그래서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유혹하다는 희랍어 '페이라스모스'라는 동사는 '재판, 시련, 유혹하다'는 뜻인데요.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의 유혹 사화에서 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말은 '능력을 검증하다'는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능력이라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을 했죠? 지난 주에. '더 큰 능력'이라고. 더 큰 능력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악령을 쫓아낸다. 악령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십 일 내내, 계속해서 이 지상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것을 행하셨다.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우셨다는 의미가, 짧지만 마르코가 워낙 짧게 빠른 이야기 전개로 자신의 복음서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마태오나 루카처럼 세 가지 유혹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유혹을 받으셨다' = 예수님의 '능력'을 검증하다

 

여기에 마르코는 상징적은 두 가지 용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 중에 첫 번째가 "들짐승들'입니다. 들짐승들은 여기에서 광야의 적막함, 황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들짐승들은 구약 성서 안에서 메시아의 통치하에서 이루어진 세상의 조화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도 언급이 됩니다. 

 

'들짐승들' : 광야의 적막함, 황량함 강조 (이사 34,11-15)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진 세상의 조화를 미리 보여 주기 위해(이사 11,6-9) 

 

예를 들면 "늑대가 새끼 양와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서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은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 11,6-9) 

 

즉 들짐승들이라고 하는 것은 황량함, 적막함이라는 광야의 어떤 그런 모습들도 보여 주시만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된 세상의 모습이 이 안에도 '들짐승들'이라는 표현이 쓰여진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마르코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던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박해  또 로마제국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기원후 70년의 성전 파괴를 본 직후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점을 상시기켜 주고 싶었다는 겁니다. 

 

로마 군대의 무력과 이에 저항하는 유다인들이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은 주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자 죽음 곧, 순교를 각오해야만 했어요. 마치 광야에서 혼자 싸워야만 하는 그런 느김이었습니다. 그때 사탄의 유혹, 배교하라는 것, 로마제국에 순응하라는 거죠. 그러나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신 예수님,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거죠.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바를 자신들도.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박해를 받는 것이 성령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 거야. 그러니 내가 이 광야에서 로마제국의 박해서에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이겨내셨잖아. 예수님과 성령이 광야로 내쫓으셨잖아. 시련 속에 들어가신 거잖아. 그런 예수님도 이겨내셨는데 그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 우리도 이겨낼 수 있다. 이 모습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거죠. 게다가 이제 위로의 말,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표현으로 마르코는 예수님의 광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3) 

 

천사들의 시중 이게 뭐죠?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을 나타내는 표징이죠. 이 시중을 들짐승들을 지배하는 것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게게 약속된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시련을 이겨내신 분으로 드러나셔요. 천사에게 주어진 직무 하나가 바로 '시중드는 일'로 우리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준다는 의미예요. 

 

* '천사들의 시중' : 하느님의 도움

 

또 구약 성경에서 천사가 시중을 든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가 40일을 걸어서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 호렙 산은 시나이 산과 같은 말이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 엘리야도 이 호렙산에서 그런데 힘들고 지쳐서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데 그 여정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죽어가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고 힘을 주죠. 그래서 광야에서 사탄과 홀로 대적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천사가 시중을 들었다는 표현은, 엘리야를 우리가 연상케 하는 거예요. 이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도움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사탄을 이겨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 예수님께,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렇게 천사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마태오와 달리 이렇게 40일 동안 지내신 예수님께서 단식을 하셨다거나 그래서 배가 고프셨다거나 이런 말을 전혀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빠른 이야기 전개가 마르코의 특징이죠. 빠른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마르코가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의도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일들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며 이미 이 광야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 있다는 것. 

 

* 예수님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 : 앞으로 이루실 일들의 한 부분 

                                    '사탄과 싸우는 것, 예수님의 더 큰 능력을 보여주는 것'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전해 주시는데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던 악령을 물리치셨구나, 내쫓으시는 일이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증언했던 예수님의 더 큰 능력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짤막한 두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광야에서 40일 동안 겪으셨던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는지 표현해 주고 있다는 거. 그래서 이제 이 세상이 사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곳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예수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쁜 소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 이것을 예수님의 광야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내용이 매우 짧습니다. 마르코는 빠른 이야기 전개로 빨리 예수님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습니다. 무엇을  전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왜 시련을 겪으셨는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십자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게 마르코의 본 의도인데 그 앞에 아무이야기 없이 시작하면 안 되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다룬 공생활 1ㅡ8장, 그래서 마르코를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렸었죠. 긴 서문을 가진 수난 이야기다. 수난, 죽음, 부활을 전하는데 공생활 부분은 하나의 서문격이다. 그런데 좀 길 뿐이다. 1ㅡ8장. 많은 이야기들을 빨리빨리 얘기해야 되니까 이렇게 두 구절로 짧게 빨리빨리 넘어가는 겁니다. 

 

그게 이제 또 드러나요. 바로 1,14-20절에서 나오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 하늘나라의 비전, 강령을 선포하시는 것.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도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짧게짧게 언급을 합니다. 그런데 할 말은 다 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설명을 다 해야 합니다. 

 

1,14-20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 무대가 바뀝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레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제 두 구절 짧게 설명한 다음에 무대가 또 바뀝니다. 물론 광야로 바뀌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제 갈릴래아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샐활이 시작되는, 공적 직무가 시작되는 갈릴래아로 무대가 바뀝니다. 

 

* 예수님의 첫 공적 직무 시작 장소 : '갈릴래아'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진 예루살렘을 빼고는 갈릴래아는 마르코 복음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1,14-15인데요. 1,1 만큼 중요합니다. 1,1절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복음서의 중요한 주제 2개를 8,29과 15,39절에 베드로와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제목으로 왔다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조와 함께 방향성도 제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14-15절이 마르코 복음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첫 목소리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인간의 목소리는 응애~ 하며 우는 것이죠. 그런데 복음서가 그렇게 그런 걸 다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년기, 성탄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태오나 루카처럼. 예를 들면, 루카는 예수님의 첫 인간의 소리가 성전에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리시고 성전에서 찾으셨을 때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게 예수님의 첫 인간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즉, 1,15절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 강령을 당신 공적 직무, 지상 사명의 강령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1,14-15절에 '복음'이라는 용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1,1이 '복음의 시작'이었듯이 예수님의 첫 말씀 안에도 '복음'이 1,14-15절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2번 나오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거는 물론 마르코 복음의 말이지만,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복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문에서 기쁜 소식의 대상이었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그 복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가 된 거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마르코는 복음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설명했는데, 인간으로서 첫 목소리를 내신 예수님은 "내가 그 복음의 주체야."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 복음 선포의 주체이신 예수님 :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드님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믿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깨우쳐야 되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 잡힌 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를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이제 체포되면서 끝난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요한의 사명 :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마르 1,4) 

                 '자기 뒤에 오시는 분' (마르 1,7) 선포 


세례자 요한은 그 준비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요한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잡혔다'는 희랍어로 파라디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넘기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넘기다, 잡혔다, 체포하다.' 그런데 '넘기다' 하면 우리가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바로 유다가 예수님을 권력자들에게 넘겼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에게 넘겼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서 또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이 때도 같은 동사를 씁니다. '넘기다, 배반하다, 체포하다' 와 같은 동사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즉 십자가의 그림자가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로 드리워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아파야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는 순간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어김없이 넘겨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마르 13,9-12) 


*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선택한 땅 : '갈릴래아'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요르단 강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요한이 체포된 뒤에 다시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자 갈릴래아로 가시는 곳을 마르코가 지금 장소로서 구체적으로 선택한 땅이 갈릴래아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사건을 하나의 계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서 체포되었다는 사건인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느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마르 1,14) 정치적 사건을 제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장소 갈릴래아는 1,14절 뿐만 아니라 1,39절에 다시 한 번 '온 갈릴래아'라고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다시 한 번 예수님의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가 1,14-15절과 39절에 반복되고 있는데, 갈릴래아는 고대 팔레스티나의 북쪽 지방을 말합니다. 특히 복음서에 언급되는 지역은 갈릴래아 저지대입니다.



 

이 갈릴래아는 동쪽으로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해안 평야 지대와 언덕까지 걸친 원형 공간으로 약 32-40 킬로미터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갈릴래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릴리'라고 하는 말이 '둥글다'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은 갈릴래아 저지대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마을이었고, 카파르나움은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카파르나움이 이제 본격적으로 첫 직무를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래아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다면 농촌, 시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농부과 어부가 대부분이엇고 그래서 어렵게 자신들이 생활을 유지해 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갈릴래아의 실질적인 땅의 주인들은 대지주들, 종교지도자들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종교 권력자들 또는 헤로데 안티파스처럼 영주들, 이런 이들이 실질적인 땅의 주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간 계층이 없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굉장히 심했던 지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로 이곳에서 활동하셨습니다.


* 갈릴래아 :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매우 심했던 지방 


물론 갈릴래아 지역에도 세포리스나 티베리아스와 같은 도시가 있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세포리아스나 티베리아스에 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신 당신의 첫 말씀, 메시지가 상류층에도 전달이 되었겠는가?그것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시지 않았으니까. 단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시고 대도시를 가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지요. 


* 갈릴래아 : 이방인의 지역, 율법 준수가 지켜지지 않는 지역. 국가 혁명의 온상 지역


하지만 갈릴래아는 당시의 많은 유다인들에게 이방인의 지역으로 묘사가 됐던 곳입니다. 즉, 율법 준수를 철저히 지키지 않는 지역 또 국가 반란, 혁명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사는 곳. 이렇게 평가가 되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이곳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복음을 예수님이 이곳에서 선포하셨다,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쁜 소식을 갖고 하느님에 의해 보내진 사자에 대해서 하느님의 영이 내린 자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이사 61,1-2) 


바로 하느님의 영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기쁜 소식을 갈릴래아에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독자들은 이미 이사야 예언서에 대해서 익숙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전해 줄 때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사 40,3의 말씀을 인용했었거든요.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그런데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자신의 독자들이 구약의 이사야서에 익숙하기 때문에 마르코가 예수님의 기쁜 소식, 복음을 갈릴래아의 선포에서도 이렇게 설명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르코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할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만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힘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의미한다는 것도 강조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복음 :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기쁜 소식은 때가 차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중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의 중심 내용이 다른 아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다가왔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 복음의 중심 내용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옴"


그 무렵에 갈릴래아에 오시어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시간을 언급하시짆아요. 때가 찼다고. 그 전에 마르고는 '그 무렵'에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이 직접 얘기하시면서는 '때가 차서'라고 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로. 이 '때가 차서'는 어느 때냐? 세상 구원에 대한 하느님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느님께서 결정하신 시간, 예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 시간이 '때가 차서 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일까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령을 물리치신 것처럼 악이 힘을 산산이 부수시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그런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림을 이끌어 내시고자 예수님을 통해서 행동하신다. 예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보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듯이 즉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고 예수라는 말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게 강조되어 선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선포하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하느님의 다스리심, 그야말로 대망의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는 시간이 다가왔다, 시작되었다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정하신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심, 하느님 나라의 세우신 이 시간, 때가 충만한 이 시간의 충만함을 위해서 우리가 응답해야 되는 자세가 이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에 취해야 할 자세 : 회개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의 충만함을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다가오심으로 알려주고 계신데, 거기에 우리의 자세를 강력하게 얘기하십니다. 회기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땅히 인간이 취해야 할 자세 곧 회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시간의 충만함, 하느님의 도래를 언급하셨던 예수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그래서 삶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요청 ; 삶의 변화 + 생각의 변화 


오늘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도 살펴보겠지만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될 거 하나를 말씀드릴다면, 앞서 세례자 요한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곧 회개를 얘기했는데 예수님도 지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와 요한의 회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분 스스로 질문을 던지셔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이고, 예수님이 주는 세례는 성령으로 주는 세례라고 그랬는데, 두 분 다 회개를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뭔가 다른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인데 물론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의 자세인데, 아직 주님이 오시기 전이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불교 신자도, 유교 신자도, 종교가 없는 사람도,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윤리적 요청에 의한 회개를 얘기한 것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10계명을 어기는 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미 오실 분을 기다리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와 있는,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서 내 생각을, 내 삶의 자세를 완전히 바꾸는 것,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 때는 오실 분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은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온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 생각, 내 삶의 자리를 완전히 바꾸라는 것입니다. 어떤 시각으로? 바로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귀로, 예수님의 입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생각이 바뀌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구하는 세례는 더 큰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바로 이런 회개의 내용을 기억하시면서 다음 시간에는 1,16절부터 제자들의 부르심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마르코복음, 회개, 세례, 복음을 믿어라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