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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자가 수준이 높아야 훌륭한 강론을 들을 수 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8 조회수1,415 추천수1 반대(0) 신고

 

 

제가 봤을 때는 종교를 불문하고 말씀은 설교, 강론, 설법 등 모든 걸 보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갈증을 느끼는 부분 중 하나가 일종의 강론, 설교 이런 것도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 이런 면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성직자라면 말씀을 전달하는 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남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 또 강론 이런 거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이런 주제로 글을 올린다는 건 경거망동한 행동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런 부분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최근에 인터넷에서 몇몇 신부님들의 글을 봤습니다. 심지어는 1년 전 글과 또는 10여 년 전 글 등 다양하게 우연히 접했습니다. 강론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예전에도 많은 생각을 했지만 최근에도 나름 끊임없이 생각을 해왔습니다. 저는 사제도 아니지만 그런 걸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이런 건 제 영역이 아니지만 분명 신부님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분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일 겁니다. 그럼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강론이 뭔지 제 나름 지금까지 생각해온 걸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가톨릭만 국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절대적인 신부님의 영역이지만 결코 신부님만의 고민거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이유에 대한 논거를 한번 후반부에 제시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신부님의 강론의 질은 신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강론에 대한 훌륭한 교회의 가르침과 교황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말씀 등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교회 내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언급하기엔 좀 그렇고요 단지 제가 그런 부분을 좀 더 호의적으로 표현을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보통 신부님들이 말씀하시는 훌륭한 강론 요건 중 하나가 제일 첫 번째로 꼽는 게 간단한 강론을 꼽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하고요 대충 이런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런 게 어쩌면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조건은 정말 상당히 어려운 조건입니다. 잘 생각해보시면요. 재미있는 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재미를 충족시키면서 내용이 짧으려면 상당히 여러 면에서 다양하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식의 핵심의 정수를 전달하려면 그게 더 고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묵상도 전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조건은 상당한 고수에게나 해당하는 그런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제가 읽어 본 신부님의 글은 초보 신부님일 때의 고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보좌신부님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강론 경험이 많지 않은 신부님께는 적잖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런 게 오랜 경험을 가진 신부님이라고 해서 이런 부분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업이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라 평소에 언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유명한 작가들이라고 해서 그분들이 하는 일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항상 언제든지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작가라고 해서 항상 좋은 글을 쓰는 건 정말 힘듭니다. 정말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짜는 노력을 해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오랜 사목의 경험을 가진 신부님조차도 정말 힘든 일 중에 하나임은 맞는 사실일 겁니다. 강론을 강의에 비유를 한번 해보면요 이것도 신자들의 수준이 다 제각기 천차만별이니 어떤 수준에 맞추어야 할지도 상당히 어려운 딜레마입니다. 제가 강의를 해봐서 압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도 지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정말 이건 힘듭니다. 그냥 주입식으로 일률적으로 지도를 한다면 모를까 그런 난제도 있습니다. 강사도 이런 입장에서 힘든 딜레마가 될 수 있지만 여기서 바로 실력 있는 강사가 되느냐 실력 없는 강사의 문제로 양분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런 조건에도 강의를 잘 할 수 있는 훌륭한 강사가 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근본원칙은 이런 것입니다. 양쪽을 다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 사용하는 하나의 팁이 있다면 바로 누구나가 아는 근본적인 원리를 통해서 어려운 수준으로 설명을 옮겨서 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가질 수 있다면 이런 상황도 가능합니다. 물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강사가 그런 수준으로 되려면 학생의 지식 수준도 정확히 파악해야 되고 또 어떻게 전달해야 학생이 잘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을 해야 그런 방법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강론 원고도 하나의 글입니다. 우리가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글이든지 글은 주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그 주제를 가능한 벗어나지 않아야 좋은 글이 됩니다. 만약 마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초보운전이라면 대충 어떻게 가야 되는지 전체 윤곽을 그리면서 운전을 하며 그 목표를 보고 가야 됩니다. 만약 가는데 도로표지판에 광주, 목포 이런 표지가 나오면 난감합니다. 물론 또 수정해서 가면 됩니다.

 

이걸 강의에 비유하자면 운전하는 사람인 강사도 길을 잘 몰라 헤매면 피곤하고 옆에 동승한 학생도 선생이 어떤 목적지에 잘 자기를 안내를 해야 되는데 정말 제대로 가지 못하면 엄청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기간 차를 타면 피곤합니다. 최대한 운전 시간을 줄여야 피곤이 들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운전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지도를 본다든지 해서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미리 숙지를 해야 자기가 혹시라도 잘못 길을 들어서면 수정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강론이든지 세상의 모든 강연이든지 이건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청중에게 전달할 때 전체 주제에서 벗어나면 그건 강사로서 자질 부족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강론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설법이나 세상의 모든 강연도 이런 건 동일합니다.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리 장시간 교회에서 훌륭한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머리에 남는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리가 되지 않은 걸 주제에서 방향이 벗어나면 듣는 사람 역시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 훌륭한 글은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잘 사용해서 미문을 사용해서 표현해야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글은 보통 훌륭한 글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글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수준으로 표현하면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글로 표현하는 게 정말 훌륭한 글입니다. 우리는 높은 수준으로 글을 쓰는 게 훌륭한 글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불문율입니다.

 

글은 누가 그럽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동의는 조금은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말로는 많은 독서가 있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물론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이 말이 맞으려면 엄청난 독서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글을 잘 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독서량이 많아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 평소 무엇이든지 엄청난 생각과 사색을 많이 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자신의 머리에 있는 지식이 정리되어 출력이 되려면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 머리에 든 지식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무엇이든지 모든 사물에 대해 많은 사색을 해야만이 충분한 사고력이 형성되어 어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고력을 형성할 수 있고 그런 사고력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정리를 잘 해야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이게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리는 일종의 글의 배치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문장을 쓸 때도 일명 부사라는 것 즉 강조어죠. 이런 강조어도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글 전체 의미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한 문장 내에서 단어 하나도 이렇는데 문단을 배치하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서 전개를 하고자 할 때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저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글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한번 어떤 강론을 들었든지 강의를 들었든지 그 여운이 머리에 남으려면 요리에 비유하자면 아무리 많은 식자재가 있어도 그것을 요리하는 레시피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요리사는 재료보다도 그 재료를 이용해서 어떻게 요리할지를 연구해서 많은 레시피를 개발하는 요리사가 훌륭한 요리사입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요리가 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고 이걸 응용하면 어떤 강론이 훌륭한 강론이 될지가 나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신부님의 강론은 신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도 애들을 지도하지만 애들이 똑똑하지 않으면 저도 자료를 열심히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사용하여 지도합니다. 근데 이제 일 년이 다되어갑니다만 정말 남자 애인데 언어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애가 있습니다.

 

앞으로 언론사 기자를 희망합니다. 이 애는 제가 봐도 상당히 언어적인 감이 있습니다. 학생이지만 상당히 똑똑합니다. 이런 애를 지도하려면 제가 엄청 연구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냥 방심했다가는 제가 한방 먹을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 중에서 전설적인 여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애를 능가하는 학생입니다. 수업을 해보면 정말 질문이 예리합니다. 그래서 어떤 질문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정말 자료를 많이 연구합니다.

 

바로 이처럼 신자도 수준이 높아져야 신부님들께서도 그런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하실 겁니다. 신자 수준이 낮으면 저 같아도 그냥 노력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부님도 많은 노력을 해도 신자가 잘 알아듣지 못하면 그냥 평범한 수준의 강론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도 나름 수준을 어떤 일정 수준으로 올려야 신부님의 훌륭한 강론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정리를 해서 다듬어 수정해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냥 일단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제 생각을 적었습니다. 이제 저녁미사에 갈 시간이네요.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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