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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구슬픈 소리를 들어보셨나요?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12 조회수1,274 추천수1 반대(0) 신고

 

 

우린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고 예수님을 믿음의 스승으로 삼고 저희는 그런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청출어람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바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난 걸 가르킬 때 흔히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청출어람을 꿈꾸는 건 어쩌면 상상도 못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의 백분의 일만이라도 걸어가는 것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이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능가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는 모든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사랑일 겁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누구나가 사랑하고 또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사랑은 가식적인 사랑도 있겠지만 진정한


사랑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일 겁니다. 사랑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닌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누구는 사랑을 주도 자신이 더 사랑을 줄 수 없어서 가슴조리며 애태우는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몸소 당신께서 그 길을 보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이 세상 인간세상에 있는 인간의 사랑으로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극치를 이루는 사랑일 겁니다. 결국 그런 사랑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셨을까요? 그 정답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어쩌면 어떤 이유가 있는 정답이라면 그것도 좀 이상한 정답일 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사랑을 했다면 그건 그 이유가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한 거나 마찬가지나 다름 없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 그 이유를 여쭤보신다면 이래저래 해서 내가 그 길을 갔다고 하시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런 대답을 하실 겁니다.


어떤 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의 숨결을 넣어 나의 모상대로 지은 내 자식인데 그런 자식이 죽어간다고 하면 어떤 아비가 그런 자식을 살리는데 어떤 이유를 댈 아비가 세상천지에 어디있겠느냐고 하시면서 그 대답 속에 바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저희를 사랑하시는 이유이지만 바로 이 이유가 맞다고 한다면 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약 직접적으로 이유를 말씀하셨다면 저희를 사랑하시는 걸 어쩌면 생색내시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런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하시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바로 그런 위대한 사랑을 하시고도 자신이 하신 사랑을 위대하시다고 포장을 하시지 않은 건 무슨 이유일까요? 바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그랬다면 온갖 생색을 다 내었을 겁니다. 또 그런 걸 드러내려고 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걸 누가 알아주었으면 하고 그런 사랑을 만약 하셨다고 가정하면 그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느님 사랑 방식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바로 성경이 증언하지 않습니까?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조건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린 이런 분을 따라가는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배우기 위해 또 실천하기 위해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어우러져 배우는 겁니다.


그런 가르침을 배우며 험난한 세상에서 힘든 세파에 찌들어진 영혼이 때론 하느님의 집인 교회 내에서 세상에서 받은  위로와 상처를 형제애로 서로 감싸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되는데 또 그런 곳이라고 여겨 위로받고자 하여 왔지만 오히려 위로는 차치하고서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도리여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게 되는 영혼을 만약 하느님께서 보시면 어떤 마음을 가지실지 생각해봤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실 겁니다. 한번 생각을 같이 해보시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구주이신 분께 자신 속에 있는 상처를 위로 받기 위해 아버지 집을 찾아왔는데 아버지 집에서 사랑은 없고 차가운 멸시와 냉대를 받는 걸 보신다면 정말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세상에서도 힘든데 하물며 내 집에 와서도 그런 상처를 받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상처에 대해 한번 생각을 해볼 게 있습니다.


저는 가장 대표적인 상처가 바로 말과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신앙생활 하면서 강론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걸 듣습니까?


말로 인해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거에 대해서 말입니다. 누구나 다 잘 알지만 실천이 잘 되지 않는 게 바로 말로 형제자매에게 입히는 상처입니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생각해본다면 좀 더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연못에 무심코 던진 돌멩이도 그 안에 있는 개구리에게 맞는다면 그 개구리는 죽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리 아무런 생각없이 던졌다고 항변을 할지는 모르지만 이 문제는 죽은 개구리의 입장에서 놓고 바라봐야 할 사안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말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모든 걸 합리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입니다. 결국 세상일은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잣대가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걸 봤을 때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려고 오고 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상 제자는 모름지기 제자로 인해 스승의 얼굴을 빛내드리는 게 제자의 도리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최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길이 바로 해답일 겁니다.


어떻게 실천할지는 모든 분이 스스로가 잘 아실 겁니다. 끝으로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남긴 말을 한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작가의 말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평소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남의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그곳에 또 자신의 말로 상처를 낸다고 했을때 그 상처에서 나오는 슬픈 소리가 저는 이 작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그게 상처받은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구슬픈 소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묵상을 한번 한다면 정말 신앙생활하면서 신중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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