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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8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11 조회수467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5주간 수요일(세계 병자의 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 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특이하게도 16절이 없는 복음입니다. 우리 성경의 주석에는 일부 수사본에는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개신교 성경 두 권을 확인한바 한 권은 "없음'으로 다른 한 권은 15절을 두 구절로 나눠서 16절을 메우고 있습니다.

성경의 章, 節구분은 생각보다 후대에 구분된 것 같습니다. 章구분은 12세기까지 거슬려 올라가지만 節구분은 16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에는 띄어 쓰기도 확실치 않았으므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성경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므로 각 지역의 필사본들을 대조하여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재구성하려는 연구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이 분야를 '성서문헌 비평학'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상대로 한 논쟁과 설득이며, 오늘 복음의 첫 단락은 민중을 상대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은 제자들에게 따로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반대편을 설득할 때와 민중들을 계몽시킬 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실 때에 하신 말씀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눈여겨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한 가지 교훈을 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반대편을 설득시키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상대편을 설득시키는 이런 방법을 저희들이 모르기 때문에 토론이 논쟁으로,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고 건전한 토론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서로가 각자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있으므로 설득을 시키지 못하고 논쟁으로,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대편을 설득시킬 때에 상대편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할 때에는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 말씀으로 그들을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상대편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성경을 통해서 설득시키고 있으므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대편을 설득시키려면 상대편이 알고 있는 사실을 활용하여야 설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상대편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짧은 지식만으로 상대편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있으므로 설득은커녕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도, 타종교를 비하하는 것도 타종교를 모르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들의 종교만 옳다고,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종교도 내 종교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상대 종교를 비하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하였습니다. 상대편이 나에 대하여 아무리 험담을 하여도 본래의 나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는 내 자신이 나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험담에 험담으로 대응하면 그만큼 내 자신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을 쌓아야 하며 이런 수양이 바로 영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따로 알려주신 말씀은 수양을 쌓아서, 영성을 쌓아서 우리가 버려야 할 나쁜 생각들인 열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열두 가지는 열둘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특유의 숫자 관념에서 비롯된 듯하며 중복된 것을 제외시켜 이를 七罪宗이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죄악으로 보는 것들은 원죄를 제외하고 모두 七罪宗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죄원(罪原)이라 합니다. 이에 관한 묵상은 '천주실의'와 함께 이 땅에 전래된 빤또하 신부의 역작 칠극(七克)의 다시 펴보며 묵상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천주학을 전래한 대표적인 서적은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마태오 리치 신부를 보좌하였던 스페인 신부로 예수회 소속인 빤또하 신부가 쓴 '칠극(七克)'입니다. 칠극은 일곱 가지 죄를 극복하는 수양 방법론으로 중국인을 대상으로 쓴 전교 서적이므로 유학과 접목시켜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벽, 정약용 선생님 등 선조 유학자들이 주어사, 천진암 등에서 講學을 열었던 것은 '천주실의''칠극' 등 천주학의 학문적 토론을 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년 은퇴하신 전 서강대 종교학과 김승혜 교수님(씨튼 수녀회 수녀님으로 미 하버드대학에서 동양철학의 연구로 석, 박사 학위 취득)의 '칠극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일부를 발췌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 2권에서 윤리 부분을 취급할 때 칠죄종(七罪宗)과 칠추덕(七樞德)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분류한 칠추덕은 빤또하의 칠추덕과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 * [칠죄종(七罪宗):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 [칠추덕(七樞德): 신중, 자비, 순결, 절제, 강건, 정의, 온유]

빤또하 신부가 직접 쓴 칠극 서문에서 오늘 복음 묵상에 참고가 될 내용을 발췌합니다.
[모든 악한 일은 욕망에서 나온다. 그러나 욕망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래 하느님이 사람들의 몸을 보호하고 정신을 도우라고 내려준, 공평한 의리와 정당한 도리를 실천하라고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다스렸기 때문에 비로소 죄가 되고 허물이 되어 온갖 악이 그것을 뿌리로 삼게 된 것이다.

이 뿌리에서 富를 바라고, 貴를 바라고, 安樂을 바라는 세 개의 큰 줄기가 생겨난다. 이 줄기는 다시 가지들을 낳는데 富는 탐욕을 낳고, 貴는 거만함을 낳고, 安樂은 식탐과 방탕함을 낳으며 게으름을 낳는다. 그리고 부와 귀와 안락이 자아를 이기면 질투를 낳고, 자아를 빼앗으면 분노를 낳는다. 여러가지 죄와 허물, 나쁜 생각과 언동 등은 이 일곱 가지가 모여서 열매가 되고 나누어져 잎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만함, 질투, 분노, 방탕과 같은 여러 욕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겸손, 어짊, 곧음, 참음과 같은 여러 덕은 끝내 쌓여지지 않는 까닭은 세 가지 이치에 어둡기 때문이다. 첫째는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깨끗하지 않는 것이며, 세째는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동양의 유학과 접목시켜서 우리 천주교를 이해시키려는 이런 노력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현실을 아쉬워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남이 나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더럽힌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큰 탓이 옵니다.’를
참으로 가슴을 치며 반성할 수 있도록
언제나 저희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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