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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9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4 조회수423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30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며 소문을 내지마라 하신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언자로 어제 묵상을 하였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민중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참된 가르침을 민중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마르 9,12)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자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알려주지만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불의한 세력으로 부터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는 예언자는 모난 돌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예언자는 정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정에 맞아 돌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결코 피하지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뜻을 민중들에게 다 알리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으므로 하느님의 뜻을 선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당신의 소문이 급격하게 퍼져나가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복음 선포의 기간은 그만큼 더 짧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였음을 마르코복음서의 기자는 오늘에서야 저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에서 '때문이다'는 어떤 이유를 설명한 술어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 해당하는 즉, 주어 구절에 해당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에 대하여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복음을 선포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비록 가시지만 당신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셨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육신은 죽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얼은 죽일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코 죽지 않고 곧바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신 말씀으로 표현한 것으로 묵상하고 있으므로 저희들이 이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듯이 지금 저희들도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묻는 것조차, 아니 의문을 갖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복음서를 잘못 이해하였거나 아니면 '육신의 부활' 교리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제가 복음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 무형의 계급이 있으나 이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서열과 계급 때문에 모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하고 모두가 첫째가 되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정책은 전국의 모든 초, 중, 고등학교에 대하여 서열을 매기고 모든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책들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잘못된 것임을 오늘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꼴찌가 되고자 하면 모두가 낮은 곳을 지향할 것이므로 아무런 탐욕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의 질서가 제대로 작동되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上善若水'의 가르침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꼴찌를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말씀이며 교회는 가장 낮은 이와 함께 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원하셨던 교회라 할 것 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린이는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비천한 이의 상징은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입니다. 어린이가 고아였다면 가장 비천한 이와 함께 하라는 말씀이며, 그렇지 않다면 어린이처럼 아무런 탐욕이 없는 순진무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비천한 이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은 나보다 못한 모든 이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빠 하느님 한 분으로 알고 있었으나 오늘부터는 나보다 못한 사람은 모두 나의 하느님으로 그렇게 기억하겠습니다. 나의 하느님은 교회 안에 계시지 않으므로 저는 하느님을 교회 밖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를 교회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나의 교회는 건물 속에 갇힌 그런 교회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바로 나의 교회로 생각하며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살아서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영원한 삶을 살라고 당부하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세상의 높은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러기에 가장 낮은 사람과 함께 하시다가 아빠 하느님께로 떠나신 예수님!
그런 당신을 따르고자 모인 저희들이 과연 당신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며
오늘도 당신의 가르침을 단 하나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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