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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낮아짐과 포용성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4 조회수876 추천수12 반대(0) 신고

 

 

 

연중 7주간 화요일 - 낮아짐과 포용성

 

몇 년 전 정말 황당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 폐륜아 아들인데 살인미수로 잡혔습니다. 그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돈을 위해 어머니 앞으로 보험을 들어놓고 어머니를 사고를 가장해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주일에 사고가 나서 죽으면 더 큰 보험금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어머니를 차로 들이받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 아들과 그 친구는 구속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휠체어에 몸을 싣고 경찰서를 찾아가서 당신이 대신 감옥신세를 질 테니 아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세상에 그 아들의 행동을 포용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그의 어머니뿐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가 그렇게 못된 짓을 하여도 다 당신들이 교육을 잘 못 시킨 탓이라며 당신들 탓을 합니다. 어머니의 포용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하느님은 부모에게 아기를 주시기 이전에 그 아기를 받아들일 포용력을 먼저 주십니다. 그것이 부성애와 모성애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잉태되자마자 아기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아기를 보지 못했음에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어떤 선물을 주시기 이전에 그것을 받을 준비를 미리 시키셨기 때문이고 이건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부모의 포용력을 가지라고 권고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좋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모두에게 있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 모든 사람들,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포용력으로 당신을 배반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대신 죄의 보속을 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생각들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커지려는 사람은 그 안에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듭니다. 자신을 죽여야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자신을 버린 무한한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너무 커지고 교만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포용할 어떠한 공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부성애라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렇게 포용력이 부족한 것은 바로 교만 때문임을 일깨워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가리옷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반하였을까요?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속으론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만든 메시아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것에 맞지 않으니 예수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해지면 다른 사람이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어머니의 포용력을 본받읍시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떤 잘못을 해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겸손은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진정 하늘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고 싶거든,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력’부터 기르라고 권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우리 자신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모든 죄의 보속의 고통을 받아들일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예수님이 잉태되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겸손한 마음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청하도록 합시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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