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아름다움 - 김수환 추기경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3 조회수633 추천수7 반대(0) 신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아름다움

 

   언젠가 이런 이야기가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여윈 어느 여자가 세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막노동, 공장의 허드렛일, 파출부 등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어머니로서 세 자녀를 키우는 재미로 모든 것을 이겨내 왔습니다. 아이들도 자라고, 이제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이른 새벽에 일하러 나가고 아이들이 잠자고 있을 때 누전으로 불이 나서 그만 세 아이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비통! 누가 무슨 말로 위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시련과 고통은 ‘하느님의 은혜’ 참으로 하느님도 무심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 없고, 하느님은 과연 계시냐 라고 그 부인이 묻는다 해도 우리는 쉽게 답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카뮈가 그랬습니다만, 나 역시 그런 경우에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몇 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내 밖에 있다가 바로 무너지는 그 시간에 무엇을 사러 갔다가 변을 당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내내 그곳에 있다가 무너지기 직전에 나왔다고 합니다. 무사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감사하겠지만, 부부가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에 거기 갔다가 변을 당함으로써 어린 남매를 고아로 남긴 경우에는 “왜? 왜?”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싶을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경우를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에 잠긴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위로의 말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을 덜어 드릴 방도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가운데 이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책임이 마치 하느님에게 있는 양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짧은 소견입니다. 만일 인간이 일으켰다든지, 천재지변 같은 자연이 일으킨 재난까지 하느님이 일일이 다 막아야 한다면, 그것은 좋을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 스스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으로 부터는 자유를 빼앗고, 인간을 단순히 로봇과 같은 기계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결국에 가서는 자연과 인간의 파괴입니다. 그런 일은 모든 존재와 생명의 주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또 고통이 왜 있는지, 왜 하필이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등에 문제를 풀지 못한다하여 ‘하느님은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그 고통과 그것을 지닌 인생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생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에 대해 설명이 안 되더라도 하느님이 있으면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느냐 라고 넋두리라도 할 수 있고, 불평, 불만, 항의라도 할 수 있습니다. 뿐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직접 체험도 하고 목격하듯이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며, 인생을 보다 깊이 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선은 고통과 수고를 통해서 이룩됩니다.


   고통 없는 인생! 아주 좋은 것 같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인생이 깊이 있을 수 있습니까? 경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고통을 모르면서 자란 사람들은 남의 사정, 남의 고통을 이해 할 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특히 신앙 속에서 겪은 사람은 인생을 깊이 살 줄 알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은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그 순간에 하느님은 어디 계셨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 때 하느님은 바로 그 비극의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에 젖은 이들의 그 고통을 참으로 깊이 나누며 하느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2차 대전 때 독일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유대 작가 엘리 비젤이라는 분이 쓴 '흑야(黑夜)'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한 번은 나치들이 유태인들의 저항심을 꺾기 위해 수용소 내 모든 재소자들을 모아 놓고 그 중에 젊은 세 사람을 골라서 교수형에 처하였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오랏줄에 매달려 죽어 가는 세 사람의 고통스러운 모습 앞에 모두가 슬픔과 분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어떤 이가 “하느님은 저기 매달려 죽어가고 있다!”하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죽어가는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이나 죽음이 인생에 있어서 끝이고 전부이냐 하는 것을 묻게 됩니다. 만일 그것이 끝이고 전부라면 아무도 그런 불행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암 환자에게, 앞에서 이야기 한 부인과 같이 졸지에 자식을 잃음으로써 삶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린 분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처형의 날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사형수에게, 또 불의의 교통사고로 평생을 누워서 지내야하는 전신마비의 젊은이에게 현세만이 인생의 전부인 경우, 우리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로 할래 야 위로할 수 가 없습니다.


   현세가 전부이고 끝이면, 불행과 고통이 많은 세상을 만든 하느님, 그런 인생 밖에 살수 없게 한 하느님은 결코 선한 존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모순이요 부조리입니다. 무엇 때문에 양심을 지켜야 하는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가 전부요 죽음이 끝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하는 말씀을 통하여 볼 때,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가 맞이해야 할 죽음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인 우리 중의 누구도 완전한 의미로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미지의 세계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계시와 진리를 통해서 약속하신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생명이 죽음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죽음은 참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새 생명의 세계를 열어주는 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고린전서 2: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은 우리의 모든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말할 수 없이 좋고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바로 그 선물을 받는 순간과 같고, 아름답고 포장된 그 선물 보따리를 푸는 순간과 같습니다. '도시의 광야'를 쓴 가를로 까레또 신부는 “우리의 현재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나기 위하여 그것을 향해 자라는 과정, 곧 태중(胎中)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은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철칙,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을 주는 불행하고 절망적인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현세의 고통도 슬픔도 없는 빛나는 생명, 기쁨과 행복을 가득한 생명으로 옮겨주는 다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믿을 뿐, 현재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이것이다 하고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대할 때 여전히 할 말을 찾기 힘듭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그가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 때 “여보게, 천국 복락이 크니까, 잘 참게!”라고 말하기란 힘듭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난 사람들 고통과 시련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그것으로 무신론자가 된 사람이 없지 않으나 그것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언젠가 잡지에서 어느 가정주부가 쓴 글을 읽고 참으로 감명 받았습니다. 이 주부는 아홉 살 난 딸아이를 잃었습니다. 딸아이는 1년 전에 재생 불량 성 빈혈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목포 골롬반병원, 그 뒤에 서울 현대중앙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 가까운 친척들, 그리고 치료하던 의사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 아이를 간호하던 간호사 한 사람은 냉담 중이었는데 회개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아홉 살의 천진무구한 아이가 9개월 간 이나 병상에서 고통을 겪다가 낫기를 바라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며 간병한 어머니와 아버지, 이웃 사람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죽었는데, 어떻게 그 고통과 죽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 하고 믿음을 가져왔습니까?


   특히 그 어머니는 그 뒤 모든 아픔과 슬픔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교리공부를 하여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이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신자인 외할머니가 준 묵주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과 성모님이 지켜 줄 것이라는 자원봉사자들과 수녀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랐으며, 그 스스로 엘리사벳이란 본명으로 대세를 받고 더욱 더 예수님과 성모님이 지켜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보면, 딸아이는 병고 속에서도 주님에게 마음을 향하고 있었고, 그 분에게 가는 길은 기차나 배를 타고 고향길 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열차’라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와 벌을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나는 구원열차 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딸아이의 청에 따라 그 어머니가 30분쯤 노래를 불러 주었더니, 아이가 갑자기 기분 좋은 목소리로 “엄마! 나 구원방주 타고 가. 한 손에 예수님 손잡고 또 한손에 성모님 손잡고, 내 또래 아이들과 깊은 바다 지나서 가는데, 구원방주는 너무너무 좋아. 금으로 된 빌로드로 되어 있고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야”라고 말했답니다.


   한 번은 또 엄마 보고 자기를 빨리 데려가 주도록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엄마는 그런 기도 할 줄 몰라”하니까 “평화와 안식을 달라고 하면 되잖아” 했답니다.


   아이는 죽는 날, 자기 몸을 깨끗이 씻어 달라고 해서 어머니가 씻겨 주자 기도하면서 “예수님, 성모님, 이제야 길을 찾았어요.”하고는 동생에게

“누나가 아프니까 기도해 줘, 뽀뽀해 줘”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고통이 참으로 큰 은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읽고 이 아이는 참으로 성녀이다. 하느님은 이 아이의 병고와 죽음을 통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다. 그 어머니가 어린 딸을 잃고 하느님을 원망해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 감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상 하직할 때 쓰고 싶은 인사 장


   고통이 없는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고통을 겪고 고통에 짖 눌려도 비인간화 될 위험이 없지 않으나, 반대로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픔도 , 시련도, 수고도, 슬픔도 그 어떤 어려움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어떤 인생이겠습니까? 인간의 깊이도 없는, 인간의 모습을 지녔음에도 인간의 정과 마음이 없는 비인간일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고통이 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상상해 볼 뿐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들 만큼 싫은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고, 고통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예수님조차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를 더욱 깊이 있는 인간, 더욱 신앙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하느님에게 향하게 하고, 참된 삶을 살게 합니다.


   프랑스의 여류작가 시몬느 베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월등하게 위대함은

고통을 없애주는 약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내가 아직 큰 고통을 겪지 않아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큰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을 도리어 원망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  인간은 병고나 고통을 통해서 정화되고 마음이 하느님을 떠났다가도 결정적으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리도록 해주니, 역시 하느님의 은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먹지 않고 병고도 없으면 하느님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3년 전, 나는 그 해 한 달 전에 암으로 별세하여 우리나라 신문에도 보도된 미국 시카고교구의 베르나르딘 추기경으로부터 성탄카드를 받았습니다. 이 분은 암으로 죽게 될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카드를 손수 써서 친지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카드의 인사말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성탄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보냅니다. 이번 성탄은 내게 특별한 성탄입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이지상에서의 마지막 성탄일 테니까요. 이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있습니다. 다가올 세상, 곧 천국에서 주님과 보다 깊이 친밀하게 하나 되는 희망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리는 주님의 육화(肉化)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심은 우리의 현세의 신앙과 희망의 바탕입니다. 제가 이제 하늘 고향을 향하여 나의 마지막여행을 떠나게 될 때, 내 마음은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에게 베풀어 준 우정과 친절, 특히 협조와 기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인사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으며,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통해 주님과 가장 깊이 친밀하게 하나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세상을 하직할 때 이런 인사 장을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출처: 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 중에서

 

                     
                       ♬ Pie Jesu (자비로운 예수)- Soprano. Barbara Hendricks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