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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8일 야곱의 우물- 마르 1, 29-3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8 조회수478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 1,29-­39)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십니다(마르 1,29). 귀한 손님을 맞으며 잔치 분위기여야 할 베드로의 집은 왠지 한쪽 구석이 어둡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1,30). 복음사가는 그 여인이 왜 아픈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열에 들떠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의 가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베드로의 장모가 그려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 삶이 온통 변해 버린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 8,21)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루카 9,61) 하고 말하자, 그분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자기 집을 온전히 떠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지만, 자신의 집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장례나 식구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자의 삶에서 무엇이 먼저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어야 한단 말이지요. ‘말씀’의 응답은 ‘실천’이 곧바로 따르지 않으면 어느새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1-­14) 제자들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처음부터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이 첫째 순위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이나 예수님께 대한 거부감이 없었겠습니까? 질병이 인간의 정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정신 또한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의 괴로움이 몸의 열로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시몬의 장모는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그 여인을 들여다보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마르 1,31). 그분의 사랑이 눈과 손을 통해 그 여인에게 전달됩니다. 그때 여인은 사위의 삶을 온통 변하게 만든 그 사람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왜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우선순위가 그 여인의 눈에 보입니다. 삶의 걱정거리와 순간의 편안함에 밀려 자라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순간 여인의 괴로움이, 몸을 들뜨게 했던 뜨거운 열이 사라집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1,32-­33)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 당시에는 대개 병의 치유와 마귀의 축출을 같은 행위로 여겼습니다. 질병의 원인을 마귀의 개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던 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마태 8,16), 또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루카 4,40) 고쳐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ㄱ.5) ‘우리의 병고를 메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는’ 그분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다음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을 봅니다(마르 1,35).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다.’는 표현은 ‘하느님께 기도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께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 외딴 곳에서의 기도’는 다른 것에 양보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당신께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과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1,38)

주님, 이 시간 당신 이름을 불러봅니다.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온몸이 뜨겁습니다. ‘하느님 나라’ 일꾼들 틈에 낄 용기가 없어 머리가 욱신거립니다. 당신 눈으로 저를 보아주시고 당신 손으로 저를 잡아주시어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하느님 나라’를 일구고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사는 제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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