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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84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8 조회수419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5주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그 무렵 29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1/14자 [연중 제1주간 수요일]복음과 동일한 복음입니다. 묵상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당시 묵상내용을 확인해 봤으나 오늘 묵상할 소재는 당시에 묵상하지 않은 내용이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은 자기 표절이라는 것이 있어서 묵상도 매번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캄캄한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를 하였다는 것은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아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아빠 하느님의 기운을 맘껏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캄캄한 새벽에 외딴곳으로 왜 혼자 기도하러 가셨을까? 기도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을 때에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한다면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아직은 열두 제자를 따로 선발하시기 이전이므로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제자라 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아직은 그들이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염원과 그들의 생각이 같을 수 없으므로 예수님은 혼자서 기도하러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시어 오늘도 아버지의 뜻을 알리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곳곳을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를 쫒아내며 병자를 고쳐주시고 계십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를 쫒아내는 이런 모습이 바로 利他行이며 자비의 실천이고 보시(布施)입니다.

불가에서는 보시를 통상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재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을 재시(財施)라하며, 진리의 가르침으로 깨우쳐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하고, 두려움과 공포에서 구제해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은 가진 것이 없어서 財施는 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진리의 가르침으로 法施를 베풀고 또, 하느님은 벌을 주시고 우리를 응징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알려주시며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등 민중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없애주고 계시므로 無畏施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財施는 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저희는 다른 것은 못해도 마음만 먹으면 財施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財施는 저희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는 것은 저희들의 몫으로 남겨둔 財施를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마지막 장인 제 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의하면 財施는 法施에 비하면 작은 보시입니다.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이 경 하나라도 타인을 위하여 전파하게 된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을 행한 그 사람의 복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교회가 저희들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쳐서 저승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저희를 깨우쳐 준다면 그 공덕은 참으로 크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법시와 무외시를 통하여 민중들을 구원하려고 새벽부터 길을 떠나시며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하시며 복음 선포 여행을 쉼 없이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두려움을 더 조장시키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믿다가 불신하면 하느님이 벌을 내려주신다고 합니다. 또 하느님을 믿어야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法施와 無畏施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의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일수록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의 자리를 그들이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몽에서 깨어나자고 부르짖었던 것이 서양의 계몽주의입니다.

유럽은 두 개의 절대 권력이 지배를 해 왔습니다. 하나는 군주권력이며 또 다른 하나는 종교권력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 동양은 절대왕권만 있었으므로 종교권력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절대왕권으로 부터 해방을 부르짖었던 것이 프랑스 시민혁명이며 종교권력으로 부터 해방을 부르짖었던 것이 계몽주의입니다.

지금 이 땅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보수근본주의 신앙관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교는 사실 지금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를 자각하여 이 땅이 사라질 때까지 영원불변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입니다. 중세의 종교관으로 현대인을 인도하려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갈수록 설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고민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 교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묵상이 비약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그만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캄캄한 새벽에 외딴곳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직은 제자들의 염원과 예수님의 염원이 다르기 때문에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께서 혼자서 기도하지 않으시도록
저희도 주님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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