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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석과 같은 자야 눈물도 없느냐?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31 조회수1,13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교중미사 때 입당성가가 116장이었습니다. 성가 가사 끝 소절이 오늘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목석 같은 자야 눈물도 없느냐? 사순 때 맞추어 부르는 성가입니다. 1절 가사입니다.

 

주 예수 바라보라 정성된 맘으로 거룩한 머리위에 피땀이 흐르며 지존한 주의 몸에 상처 가득하다 목석과 같은 자야 눈물도 없느냐? 입당 성가가 끝나고 바로 신부님의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바로 전례 시작할 때 미사통상문인가요 아무튼 처음 전례 책에 나오는 기도 내용이 오늘 복음에 맞추어 돌아온 탕자를 내용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침 오늘 제대 밑에 바로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의 그림으로 제대가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자그마한 탕자의 성화가 그려진 목각본이 있습니다. 예전에 마산 수정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구입했습니다. 이 성화를 보며 자주 묵상하곤 했습니다.

 

오늘 가사와 또 복음 그리고 돌아온 탕자 성화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눈물을 함께 보며 미사 내내 눈물에 대해 묵상을 하며 미사를 했습니다. 저는 성경 지식이 일천해서 성경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좀 색다른 생각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많이 들은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작은 아들을 용서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에 대해서 포커스를 두는 강론이나 설교를 들었습니다. 물론 이게 맞습니다. 저는 오늘은 이 포커스를 큰아들에게 한번 두려고 합니다. 이 복음과 강론을 들으면서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항상 한 가지 약간 가슴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해석이 큰아들을 부정적으로만 해석을 합니다. 쉽게 말해 동생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 대해 교회나 어떤 영성 서적이나 많은 강론에서 설명을 할 때 드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큰아들을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또 작은 아들을 무조건 용서를 하는 비유를 어떤 기준이 없이 획일적으로 자비에만 맞추어 해석을 한다고 봤을 때 그러면 누구나가 이걸 신앙에 비유하자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열심을 덜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그냥 뉘우치면 저런 대접을 받는데 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면도 한번은 생각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큰아들이 토라져 있을 때 아버지가 큰아들을 달래고 얼래고 합니다.

 

저는 정말 이 복음을 말할 때 이 부분을 좀 더 부각해서 전달해야만이 이 복음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근데 지금까지 제가 강론이나 책 등을 통해서 봐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시는 걸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깊이 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저는 강론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만약 제가 사제라고 가정하고 강론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한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일단 미친 상상일 수 있습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인 탕자를 용서하되 큰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열심히 생활한 면을 좀 더 부각한 다음 작은아들에 대해 그다음 초점으로 이어져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복음에는 큰아들을 타이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물론 복음사가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알지만 이런 면에 대해 큰아들에 대한 긍정적인 면도 바라봐야 우리는 균형잡힌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오늘 강론은 저희 본당에 실습나오신 부제님이 강론을 하셨습니다. 강론 내용 중에 돌아온 탕자에 대한 그림에 대한 어떤 설명 중 빛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제가 예전에 책에서 한번 봤습니다.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는데 나중에 이 자료를 한번 다시 찾아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기억을 좀 되돌려보면 이 성화가 성화에서 명암의 밝기를 두고 렘브란트 화가의 의도가 반영됐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성화를 보고도 사실 묵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렘브란트 화가가 이 성화를 그렸을 때 이 성화가 보여주는 느낌을 복음에서 말하는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건 렘브란트의 우수한 그림 솜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탕자의 삶을 살았고 또 자신이 그런 삶에 대해 회개를 한 시점에서 이 성화를 그렸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화에 그런 자신의 삶과 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내용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또 한 손은 투박한 아버지의 손으로 그리고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을 묘사한 것만 봐도 정말 이 성화 하나에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잘 묘사를 했다고 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정말 부모의 마음은 잘 된 자식보다 못 된 자식에게 더 애처러운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화에 나오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고도 토라진다면 그건 정말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큰아들이 그렇게 자신의 집나간 동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하며 동생 걱정에 눈물 흘리는 아비의 마음과 아비의 눈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큰아들의 잘못을 하나 꼽자면 일단은 이 큰아들의 마음은 이해는 하지만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말 기뻐해야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다음에 자신의 앙금의 감정이 있다면 기뻐하고 나서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거나 동생에게 털어났다면 오히려 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처음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보다도 더 진실되게 회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그런 입장이라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를 모신 형에게 더 많이 미안해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생이 진정으로 더 감동적인 회개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그렇게 했더라면 자신의 입지도 훌륭한 형으로 복음에서 기록될 건데 그걸 생각하지 못한 큰아들의 모습이 좀 아쉽네요. 오늘 바로 미사 때 시작성가에 나온 가사의 한 소절을 보며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목석과 같은 자야 눈물도 없냐? 이 성가 가사가 오늘은 바로 큰아들과 우리 자신을 겨냥해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말 이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이 만약 마음으로야 미운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함께 아버지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더라면 정말 한 편의 아름다운 감동적인 복음이 될 수 있었는데 하는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루리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만의 이상한 묵상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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