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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시 수도자의 길을 택한 까닭 - 김 찬 선(작은 형제회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7 조회수660 추천수11 반대(0) 신고
 

다시 수도자의 길을 택한 까닭

                        

   ‘나의 부활 체험’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바로 떠오른 생각은 ‘내가 과연 이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였다. 그것은 내가 대단히 겸손해서가 아니라, 정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활(復活)이란 말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고,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참으로 죽은 적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죽은 시늉을 한 적은 있고, 반쯤 죽은 적도 있지만 완전히 죽은 적은 없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부활 체험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 부탁을 받고서야 나는 온전한 부활 체험이 내게 없음을 깨닫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게다가 이러한 내가 수도자랍시고 수난이 어쩌고, 부활이 어쩌고 하였으니 죽음과 부활 체험을 깊이 한 평신도들 보기에 너무도 창피하다. 그러나 이제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의 체험을 나누고자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 흉내 내기


   나는 참으로 일찍 수도원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직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없음에도 벌써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수도원에서 살았고, 우리 수도원 양성의 한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 형제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수도원에서 사춘기의 고민도 하였고, 수도원에서 성년식을 치렀으며, 수도원에서 온갖 꿈을 꾸었다.


   나의 꿈은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사부(師父)라고 부르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되는 것이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한 변변한 책이 없던 그때, 선배들을 통해 듣게 된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한 얘기는 전설적인 영웅담처럼 꿈과 이상에 불타던 나를 사로잡았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느껴져 예수님께 죄스러울 정도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렇게 훌륭한 것이 당연한 반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할 수 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거리감이 있었지만 프란치스코는 같은 인간이기에 더욱 가깝다는 느낌과 더불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프란치스코의 글들과 전기들이 번역되었을 때 복음보다 더 많이 읽었다. 그리고 요즈음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흉내 내듯 나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대로 흉내 내는데 온 힘을 쏟았다.


   부자였고 놀이를 할 때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거지가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너무도 멋져 보여 나도 거지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러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웠고 멋을 부리는 같은 또래를 보면 ‘얼마나 속이 비었으면 겉을 그렇게 꾸미고 다닐까?’ 하며 으스대기까지 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돌을 베개 삼아 잤다는 얘기를 듣고는 나도 불편한 잠자리에서 자겠다고 침대에 돌을 깔고 자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웬만큼 흉내 낼 수 있었는데 먹는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근처에도 못 갈 정도로 프란치스코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란치스코는 단식을 너무 많이 하여 죽을 때까지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였고, 맛을 없애려고 음식에 물을 타거나 재를 뿌려 먹곤 하였단다. 심지어는 갈증이 나도 물을 다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갈증이 하느님께 대한 갈증으로 바뀌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포도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단다.


   그런데 나는 단식은커녕 적게 먹는 것도 힘들었고, 맛있는 것이 나오면 너무도 괴로웠다. 안 먹을 수도 없었고, 먹고 나면 먹고 싶은 욕구에 진 자신이 너무도 실망스럽고 미웠기 때문이었다. 더더욱 뿌리치기 어려운 것은 술 한 잔의 유혹이었다. 충만감과 모든 것과의 따듯한 교감을 가져다주는 술 한 잔은 이상에 못 미치는 자신을 자학하던 나의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창 자랄 때 많이 먹고 싶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데, 먹는 것 하나 제대로 절제하지 못하는 나는 수도생활을 할 자격이 없을뿐더러 프란치스코는 더더욱 따를 자격이 없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성소를 포기했던 사건


   몇 년 동안 이런 나날을 보내다가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하사관으로 차출되어 6개월이나 계속되는 고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끔찍스러운 기합과 구타는 그 당시 누구나 당하는 것이기에 참을 만하였지만 인간을 개돼지 취급하는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독기를 품고 이에 대항하였는데 정작 품위를 잃게 한 것은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내 안의 욕구였다. 군대 가기 전에, 프란치스칸이었으며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굶어죽은 콜베 성인의 생애를 듣고, 나도 군대에 가면 성인을 본받아 무엇을 먹을 때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걸신이 들린 듯 온통 먹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먹는 것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나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였지만 아무리 배고파도 정량 급식 외에는 절대로 매점에서 사먹지 않는 것으로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그런데 훈련을 마쳐갈 무렵, 딱 한 번만 빵을 사먹자는 유혹의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여러 번이면 안 되고 한 번이면 괜찮은 양, 나는 딱 한 번이라는 생각에 너무도 쉽게 유혹에 넘어갔다.


   빵을 사들고 먹을 곳을 찾는데, 남 주지 않고 혼자 먹으려니 혼자 먹을 수 있는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사서 같이 나누어 먹으면 그만일 것을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었는지 돈이 많이 있었음에도 딱 하나만 사서 혼자 먹으려 한 것이었다. 결국 정신없이 빵을 들고 찾아간 곳이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빵을 먹고 빵 봉지를 버릴 때에야 내가 무슨 짓을 하였고, 어디서 빵을 먹었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고 더더욱 수도자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빵 봉지를 화장실 바닥에 버리는 순간 나의 성소도 포기하였다. 20년 이상 오직 수도자가 되는 것밖에 모르던 나의 성소를 그렇게 한순간에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도원에서 연락이 와도 응하지 않고, 휴가를 나와서도 수도원은 찾지도 않았다. 이후 군 생활 3년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뒹구는 자포자기의 나날이었다. 이것이 내 일생 단 한 번의 죽음을 체험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찾은 성소


   이렇게 3년을 보내고 제대할 때가 되었다. 수도원의 퇴회 절차를 밟기 위해서라도 제대하면 수도원에 와달라는 편지가 왔다. 나 또한 마지막 인사도 드리고, 절차를 밟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여 수도원에 들렀는데, 당시 원장신부님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나가긴 나가는데 법적으로는 퇴회 처리를 하지 않을 터이니 밖에 살면서 깊이 생각하고 다시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크나큰 배려를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결례이고, 어차피 떠나는데 법적인 처리를 지금 하든, 나중에 하든 마찬가지이기에 나는 마치 누구의 요청을 너그러이 들어주는 양 동의를 하고 수도원을 떠났다.


   그렇게 떠났지만 수도자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한편으로는 먹고살 궁리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음으로 그래도 날마다 성서를 읽었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선하신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와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라는 두 구절을 읽고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선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하고 반문하실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선 자체이신 예수님도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데 하찮은 내가 자신을 자학하고 자포자기 한 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교만하여 당신을 보지 못했고, 교만하여 당신을 제 안에서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저의 부족한 모습에만 집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만하여 부족한 저를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의 은총인 성소를 포기하려 하였습니다. 저의 부족을 모르고 당신께서 부르신 것 아닌 줄 알았으나, 이제는 그저 감사하며 부르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그때까지 하느님은 내 안에서 죽어계셨고, 그저 내 힘으로 내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가 되려고 발버둥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사건들과 복음을 통해서 살아계신 당신의 역사를 보이셨고, 더욱이 나의 죄스런 반항을 통해서도 당신의 살아계심을 멋지게 드러내 보이신 것이었다.


   나의 성소와 먹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


   긴 세월을 보내고 나서 뒤돌아보니 그 당시 그렇게 심각했던 일이 이제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한낱 먹는 것 때문에 하마터면 성소를 잃을뻔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먹는 것은 나의 성소와 밀접하다. 먹는 것이 귀하던 어린 시절, 어른들은 신부님께만 쌀밥을 드렸는데, 그것도 꾹꾹 눌러 고봉으로 담아드리면 신부님께서는 반쯤 남겨주셨다. 그러면 사람들은 신부님께서 드시던 밥을 먹으면 명오가 열린다고 하며 서로 먹으려 하였다. 나는 아마도 이것을 보고 신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이렇듯 나는 먹는 것 때문에 성소를 갖게 되었고 빵 하나 때문에 성소를 잃을 뻔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나를 부르시고, 별것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우매한 나를 멋지게 다시 살리신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 김 찬 선(작은 형제회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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