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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사명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11 조회수499 추천수7 반대(0) 신고

 

사 명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사명은 이방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명을 주신 시점이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갈라 1,15)라고 한다.
   하지만 회심하기 전까지, 복음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어떻게 태중에서부터 사도로 뽑히었다고 하는가? 혹시 성경을 훤히 알고 있던 사도가 과거 예언자들의(예레 1,5; 이사 49,1.5.) 소명기사를 단순히 복제한 것일까?

   사건을 다시 되돌리면, 사도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른 길을 찾은 것이 아니다. 유다교에 대해 갑자기 신망을 잃어 그리스도교로 전환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다마스쿠스 사건을 ‘회심’(回心)이나 ‘회개’(悔改) 또는 ‘개종’(改宗)이라고 부르는 것 모두 적당치 않다. 자신의 의지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속된 말로 ‘날벼 락’을 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마른 하늘에) 엄청난 은총이(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사도는 그때의 일을 회고하며 “칠삭둥이 같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1코린 15,8-10)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신의 소명이 탄생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가 성공을 거두자, 그의 사도적 기원을 끊임없이 따지며 비난하는 적대자들이 생겨났다. 사도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논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을 더욱 뚜렷하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의 편지 첫머리를 비교해보면 초기의 서간보다는 후기, 또 격앙된 문체의 편지일수록 자신이 ‘사도’임을 장황하고 강력하게 표명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배 속에 있을 때부터’라는 말은
   첫째로, 바오로에게 사명을 준 주체가 자신은 물론 어떤 사람(베드로나 바르나바 같은)이나, 어떤 권위(예루살렘 교회나 안티오키아 교회 같은)도 아닌 생명의 주인인 ‘하느님’임을 공표하는 말이다.
   둘째로, ‘배 속에 있을 때부터’라는 말은 사도가 어린 시절부터 이방인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정황을 생각하게 한다. 그 세계의 문화에 익숙했던 사도이기에 이방인의 사도직이 매우 적합했던 것이다. 언어 구사에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제국의 영토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시민권까지 가졌으니 얼마나 유리한 조건이었겠는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사도는 자신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안배에 대해 진정 경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을지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없다. 바오로 사도처럼 열심히 선교하고 봉사하며 점차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온갖 핍박에도 기쁨과 열정으로 지속할 수 있다. 은총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작은 반대에도 꺾이고 만다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억만금의 탈렌트를 땅에 묻는 일일지 모른다.

 

이인옥(체칠리아) 말씀봉사자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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