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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가벗고, 일곱 번 - 장재봉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11 조회수831 추천수5 반대(0) 신고
 

발가벗고, 일곱 번

 

   가끔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공생활 동안 곧잘 성경을 인용하신 걸 보면 예수님께서도 성경으로 하느님을 배우고 공부하셨을 것이라는 발칙한 생각이 드는 까닭이지요. 예수님의 설명은 참 편안합니다. 하늘, 바람, 농부와 밭, 양 떼와 목자, 물고기며 빵이며 누룩…. 역시 세상을 만드신 주님의 솜씨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빗대어 큰 감동을 주는 일에도 드러나는 것인가 싶습니다.


   더욱이 결코 머무르시지 않는 분, 항상 새로우신 분의 일깨움은 매일 매일 자라고 변화하기도 하니, 글을 쓰는 일이 조심스럽고 강의 신청에 머뭇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묻고 또 묻는 미련함을 탓하지 않으시는 분께 ‘순간 포착’의 은총을 구하며 오늘도 성경을 폅니다.


   뻔뻔한 엘리야와 건방진 엘리사

   하느님의 약속대로 태어나시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고백으로 생을 마감하신 예수님의 삶은 ‘말씀’ 자체였습니다. 이는 악마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면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공생활이 성경 말씀을 바로 세우는 일에 치중된 것을 보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고향 갈릴래아에서 냉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사렙타 과부와 나아만의 이야기를 꼭 집어 들려 주신 사실에 주목해 볼까 싶은데요.


   허다한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제치고 두 사람이 선택된 이유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진 것이라고는 딱 한 끼니 때울 밀가루뿐이었던 과부와 세상이 부러워할 지위와 명예, 재산, 권력까지 지닌 나아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쉬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에둘러 엘리야 예언자와 엘리사 예언자의 언행이 평소와 판이했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삼 년 동안 가물 것이라 예언했던 엘리야는 아합 임금을 피해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냈습니다(1열왕 17,2 참조). 시냇물이 마를 때까지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양식으로 연명했다니 사렙타 과부를 만났던 엘리야의 행색은 정말 꾀죄죄하고 볼품없었을 터입니다. 그 몰골로 ‘물 한 그릇’을 청하는데도 마다하지 않는 따스한 마음에 용기를 냈을까요?


   물을 뜨러 가는 과부에게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1열왕 17,11) 하며 뻔뻔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고 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과부의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나 먼저’ 빵을 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시장했던 모양이라 짚어지지만 딱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뿐인가요? 엘리야보다 영의 능력을 곱절로 받아 평생 사랑을 실천했던 엘리사가 나아만을 대하는 태도는 건방지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아람은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고 상대가 그 군대의 장수라는 걸 알면서 웬 망발인가 싶을 지경입니다.


   물론 사렙타 과부는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1열왕 17,16) 않는 기적을 얻었고, 나아만의 나병은 “어린 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2열왕 5,14) 깨끗해졌습니다. 그렇더라도 세상 일에는 순리가 있기 마련이고 결과 못지 않게 과정도 중요한 법이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벌건 대낮에 발가벗고 요르단 강을 들락거린 나아만


   나아만은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것을 요구해도 다 들어 줄 각오를 가졌을 법도 합니다. 끔찍한 나병이 낫는 일인데 무엇이 아까웠겠습니까? 더욱이 임금이 친서를 적어 주고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2열왕 5,5)의 예물까지 보태 주었으니, 이만하면 병을 낫게 하는 대가치고는 ‘엄청 후하다’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는 코끝도 내밀지 않고 고작 심부름꾼을 통해서 말을 전합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2열왕 5,10).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습니까?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2열왕 5,11) 했던 나아만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겠습니다. 성을 내며 발길을 돌리려 했던 마음을 백 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벌건 대낮에 혼자 발가벗고 요르단 강에 들락거리라니 한 나라의 장수에게 이 같은 모욕이 있겠는지요.


   하물며 주르르 달고 온 부하들 앞에서 당한 일이니, 나아만이 느꼈을 모멸감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살갗은 이미 헤지고 문드러져 흉하게 썩어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2열왕 5,12)고 외치는 나아만의 볼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싶습니다. 사람의 자존심이란 퍽 예민한 것이니 그 순간 구겨진 장군의 위상보다 더 심하게 땅에 떨어진 것은 나아만의 자존심이었겠지요.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꼬박 여섯 해를 신학생들과 함께 했고, 지금은 안식년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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