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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29일 야곱의 우물- 요한 12, 20-33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29 조회수494 추천수6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요한 12,20-­33)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밀알 하나의 비유’는 예수께서 자기 앞에 짙게 드리운 수난과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며, 곧 닥칠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암시인 동시에 제자들을 향해 죽을 각오를 단단히 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 죽음이 끝은 아니라는 신념, 하늘나라를 위해 바쳐진 목숨은 반드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확신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대속(代贖)적 가치를 지닌 우주적 죽음으로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고 겨우 밀알 하나의 죽음에 빗대어 표현하십니다. 예수께서 죽음 앞에 당당하면서도 그 의미를 섣불리 과장하지 않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밀과 보리를 땅 속에 심으면 땅속의 습기와 적당한 온도에 의해 점점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 싹들은 밀과 보리 안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그것을 다 먹고 나면 흙 속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힘차게 자랍니다. 땅에 심은 밀알이 반드시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희생 없이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썩은 밀알이 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오래 살려고 집착한 적이 없었고 부유하게 살려고 물질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고 안락한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면 얼마든지 십자가를 면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당신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편안함도 부유함도 명예도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시어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생명에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현대인들은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고 부요하게 인기를 누리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완벽한 포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사실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면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하늘의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포기하고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에 쥔 것을 빼앗길까 봐 더욱 꼭 쥐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12,26) 성경 한 구절에 섬긴다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베풀어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예수님을 믿으나 안 믿으나 주시는 은혜가 기본적인 은혜입니다.
 
예를 들면 햇빛, 공기, 맑은 물, 사는 땅을 믿는 사람에게만 주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누릴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은혜, 곧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구원은 믿는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 주는 은혜 위에 은혜가 또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인을 향해 충성스런 노예처럼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며 섬기신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비전을 바라보며 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섬김 받겠다고 힘겨루기를 일삼는 세상의 자세를 버리고 반대로 서로 행복하게 해주려고 먼저 남을 섬기는 자세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오시던 그 순간뿐 아니라 오늘도 작고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헌신과 섬김이 따를 때 생명이 태어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런 섬김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희생 제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섬김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지극하면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남에게 섬김을 받는 것보다 남을 섬길 때 그 사람은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참사랑은 자신의 행복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더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남을 섬김으로써 남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사람 자신이 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신비로운 비밀의 하나일 것입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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