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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이가 이렇게 딘지 얼마나 되었는냐?'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3 조회수471 추천수4 반대(0) 신고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9,14-20)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당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글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이를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하고 청한다. 어쩌면 이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이 계실런 지도 모른다.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또 그런 아이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까?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당신에게 와서 청하는 아버지부터 진찰을 하신다. 예수님은 제일먼저 아이가 자라온 주변 환경을 물으신다.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마도 예수님이 보셨을 때 그 아이의 증세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꽤나 오래된 것같이 보이셨나 보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한테 흔히 듣는 질문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꽤나 오래되었고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고 아이의 상태를 말 한 것을 들어보면 꽤나 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이의 병은 아이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를 고치려면 무엇보다 아이를 병들게 한 아버지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어쩌면 아이보다 아버지가 더 중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전염되었고 더 나아가 다른 가족 전체에게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은 무슨 병인가? 아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버지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병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집어서 아버지에게 말씀하신다.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하고 이르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즉 아이의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가 "믿음이 없는 저를"이라고 고백하였듯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병이었다. 즉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아이를 더러운 영이 들게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아이는 어릴 적부터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린 아이다. "아이"라는 말은 부모의 보호 밑에 자라는 나이다. 즉 자기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이이다. 이 아이는 "믿음이 없는"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들은 것 없이 자란 아이다.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 아들은 말을 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은 하나의 언어이다. 즉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자연히 그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언어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로 표현할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로 표현할 것이다. 그 언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익혀온 언어이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를 가르쳤을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를 가르쳤을 것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언어를 모국어라고 하고 그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를 배울 때에 기초가 되고 모국어는 자연스럽게 언제 어디에서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커서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면 아주 힘들다. 아무리 배워도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이미 모국어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배운 언어는 무슨 언어일가? 아이는 믿음에 대해서 배우지를 못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고 말한 적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벙어리 영이 들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는 분명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는 것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고 말이다. 절대로 이 아이는 벙어리가 아니다. 정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충분히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요, 너무 격하고 이상한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하느님을 모르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격하고 강하고 이상하다. 아무리 약한 소리라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준다. 하지만 하느님에 관한 언어가 아닐 때 그 어떤 언어도 그 어떤 말도 이상한 소리요, 이상한 언어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벙어리이다. 다른 말은 정신없이 떠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물 속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면서까지 신나게 말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라면 모두가 벙어리이다.

 

평소에 그렇게 말 잘하던 사람도 기도하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하느님을 전하라면 모두가 입을 다문다. 춤을 추라고 하고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신나서 구들장이 내려 앉을 것처럼 방방 뛰고 몸을 뒤흔들고 꼬리를 치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건만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또 신자들의 기도를 하라고 하면 언제 내가 말을 했던가할 정도로 모두가 벙어리이다. 왜 그럴까? 어리적부터 아니면 신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하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읽지도 않고 복음에 대해서 들은 것도 없고 그저 왔다 갔다만 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인은 모든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나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고 아이들을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교육을 시키려면 부모가 먼저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언어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생활 속에서 복음을 토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복음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예수님이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라고 한탄하실만큼 믿음이 없는 세대이다. 나라 전체가 로또 복권같은 허황된 꿈에 들 떠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짓말, 남을 비방하는 말, 사람을 죽이는 말, 사기, 부정, 음란, 도박, 마약 등으로 병들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말을 배우겠는가?

 

부모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과연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매일 보는 것이 서로 싸우고, 세상 이야기 뿐이고, 술, 도박, 이혼, 비정상적인 관계 등의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 알겠는가?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가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한탄은 2천 년 전의 한탄이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가 성당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은 아이의 탓이라고 보기보다는 어쩌면 부모의 탓이 아닐까?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늘의 아이로 성장시켜 온 것일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잘못되었다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라온 가정 환경, 부모의 영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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