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3주일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4 조회수50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부활 축하합니다.

부활하셨어요?


부활을 보는 세 가지의 견해가 있어요.

첫 번째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주님 부활하셨다는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부활의 현세적인 의미만을 외치고 있어요.


두 번째,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주님 부활만을 역설하다가 보니까

부활의 현세적인 의미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세 번째, 복음주의자들은 영적으로 균형 감각이 있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부활의 실제성도 믿으면서, 동시에 부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현세의 삶을 균형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내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과연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던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나,

내 모습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부활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일곱 마귀한테 사로잡혀 살던 여인이었고,

몸을 팔던 거리의 창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했고, 그 후부터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과 뛰어난 충성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인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것 같은 슬픔 속에 잠겨 있었어요.

얼마나 슬펐던지 부활한 예수님이 바로 뒤에 계셨는데도 눈물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슬픔과 깊은 그리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첫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우리도 붙잡혀 가면 어쩌나~’

그런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죽음의 공포, 앞날에 대한 공포....

온갖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직까지도 남편과 자식을 바닷속에 수장시켜 놓고 그야말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그 가족들에게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몇 개월 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며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 온갖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면서 치유의 말을 건네주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사도 토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토마에게 “주님이 다녀가셨어~”

토마가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다들 맛이 갔어~ 눈을 보니까 제 정신이 아니야.’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 열 받으셨어요.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는 딱 두 마디 했지요...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모든 분열과 깨어짐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심과 회의와 불신!

이것을 이기는 말은 신의(信義)입니다.


사제들은 젊은 부부들을 혼배성사하면서 묻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과 신의와 존경을 바치겠습니까?”

 

사랑과 신의와 존경 중에서 뭐가 제일 중요합니까?

신의가 깨어지면 사랑이고 존경이고 다 헛것입니다.


부부사이에 믿음, 신의가 깨어지면

어찌 사랑하는 마음이 들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허구한 날, 내 남편이 나를 속이고 산다!

내 마누라가 나 몰래 뭔가 속이는 것 같다!

신의가 깨어져버리면 존경이고 뭐고 없습니다.


사제들도 주교님에 대한 신의가 깨어지면 존경을 할 수 없습니다.

순명은 죽으나 사나 했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매 성목요일마다 일 년에 한 번씩 순명서약을 또 받습니다.


사제서품 때 보면 "존경을 가지고 순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존경을 억지로 할 수 있습니까?

순명은 존경과 상관없이 할 수 있어요...약속한 거니까~


토마는 의심과 회의와 불신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그런 사람 앞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겁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네 번째,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서를 풀이해주시고 빵을 축성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마자 낙담하고 절망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서 낙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긴 삼십여리 길을 예수님과 동행했는데도 낙담과 절망감이

눈에 씌어가지고 3년이나 함께 한 그 스승님을 못 알아본 겁니다.


주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다 보면 낙심이 됩니다.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못 배웠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체념하고, 숙명론자처럼 전락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달라집니다.

갈 때는 절망의 엠마오 길이었지만, 올 때는 희망의 길이 되어

‘단숨에 뛰어왔다~’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섯 번째로 주님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마주쳤습니다.

주님을 잃고, 고기잡이하던 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밤새 고기를 못 잡아서 기진맥진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 쪽에 그물을 쳐라!’


성서에 153마리가 걸렸다고 나와 있지요?

왜 하필 153마리라고 요한복음 사가는 숫자를 기록했을까요?

백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오십은 유대인의 열두지파의 부족들이 오십지파입니다.


삼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밑에 이 세상 모든 족속, 민족들이

그물이라고 하는 고리에 걸려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고기가 많은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라고 나와 있지요?

그 그물을 끌어올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으뜸 사도,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사도가 그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그런데 한 번만 그 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을 똑같이 물으시고

세 번 똑같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왜 세 번을 물으셨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명예회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배반했던 전과자입니다.

늘 부끄러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지요.

맏형 노릇을 못했다고 하는 그 괴로움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세 번 대답을 들으심으로써 영적인 명예회복을 시켜주시고

다시 사도직을 맡기신 겁니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영원히 가둔다고 그럽니다.

수치심에 빠져 있는 사람은 늘 자기 감옥 안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첫 번째,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슬픔과 눈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두 번째, 다락방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세 번째,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의심과 불신으로 해방시켜 주셨고


네 번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낙담과 절망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 다섯 종류의 인간들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슬픔과 눈물과 탄식의

깊은 골짜기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성지는 기쁘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죽지 못해서

'죽더라도 내가 성지에 가서 죽으리라!'

'엄마가 있는 곳에 죽으리라!' 는 마음을 가지고

바닥을 벅벅 긁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도 이 자리에 많습니다.


그런 분들, 부활한 예수님, 여러분 앞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공포와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많은 암환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과연 나에게 생명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의사들한테 “이건 의학으로 못 고칩니다.” 이 말을 듣고

아픈 몸을 끌고 다니면서 별의별 약을 다 먹어도 효험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족 가운데도 얼마나 암환자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다고 하는 것!

그 생각을 하면 공포와 두려움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뀝니다.


토마처럼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의심과 불신 속에 살아왔는가?

토마와 같은 그런 불신 때문에 표류하는 배처럼 흔들렸다 하더라도

오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낙담과 절망 때문에

24시간 예수님이 내 옆에 계시는데도~

일 년 열두 달, 성모님이 내 집에 계셔서 늘 나를 전구해 주고 계시는데도

그저 걱정만 하다가,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성모님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오늘 그런 분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서

빵을 떼어주시고, 말씀을 풀이해 주실 때

가슴이 얼마나 타올랐던가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수치심과 부끄러움 때문에, 죄의식 때문에....

고해성사를 봐도 쉽게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그런 분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돌아온 탕자가 과연 다시 기어나가지 않았을까!

성서에는 큰 아들 달래가지고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 잡아서

잔치 하는 것으로 끝나지요?.


큰아들은 뿔따구가 났습니다.

‘창녀한테 빠진 저 놈한테는 저렇게 잘하고... 내가 친구들

데려올 때는 토끼새끼 한 마리 안 잡아 주더니...‘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돌아온 탕자는 얌전하게 집에 가만히 있었을까?

적어도 몇 가지를 넘지 못하면 그 아들, 다시 기어나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죄의식입니다.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아이구, 저 개망나니~저거, 몇 개월이나 붙어있을까! 또 기어나갈 거야’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죄의식, 이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 그랬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내 죄가 아무리 진홍색처럼 붉어도

하느님은 나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은 나를 용서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나를 끌어안으신다는 것.....

그 생각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것도 예수님을 바로 코앞에 두고 “이 사람 몰라요!”

이건 독성죄가 아니라 지옥에 바로 떨어질 죄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몽둥이로 두드려 패신 것이 아니라

연민의 눈으로 세 번 부르시면서 명예회복을 시켜주십니다.


교우여러분들, 오늘 묵상한 여러 가지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해방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내면에서 나를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어둠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상처 있습니다.

상처라고 하는 것은 고무지우개로 지우듯이 한순간에 지워지는 게 아닙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상처가 있고,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상처가 다 있습니다.

주교님은 상처 없겠습니까?


여러분들, 이 중에는 소풍 오는 기분으로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중에는 신자가 아닌 분들도 있을 겁니다.

거기 가면 병 낫는다더라!

끌려온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 중요한 것 아닙니다.


성서에 믿음을 가지고 칭찬 받으면서 치유 받은 사람은

다섯 사람 이내입니다.

99%는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모르고 쫓아다녔습니다.

‘저 사람만 쫓아다니다 보면 병이 낫는대!’


예수님은 치유시켜 주실 때 까다롭게

‘네 믿음 어느 정도냐!’

‘꾸르실료는 다녀왔냐?’

‘성령 기도회는 잘 참석하냐?’

‘교무금 착실히 내고 있냐?’

이렇게 묻지 않으시고 치유시켜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 어쩌다 왔을지 몰라도

성모님의 많은 기도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오셨다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느티나무신부님ㅡ2010. 04. 10  기도와 찬미의 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