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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레 짐작하는 믿음의 한계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3 조회수537 추천수6 반대(0) 신고
 
 

지레 짐작하는 믿음의 한계 - 윤경재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 5,21-43)

 

 이 대목은 세 공관복음서가 모두 인용합니다. 유독 마르코 저자만 지나칠 만큼 상세하게 상황 설명을 썼습니다. 분량을 보면 마태오복음서보다 두 배가량이나 깁니다. 루카복음서에 비해도 한 배 반은 족히 됩니다.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서 주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공생활에서 만나는 군중, 바리사이들, 가족들은 물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분의 인격을 몰랐다고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과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습의 차이를 극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신앙인인 우리도 이런 몰이해의 함정에 빠져 자기 짐작대로 신앙 생활하는 때가 많습니다. 신앙이란 한꺼번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네 삶을 살면서 실제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밀려드는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매순간 첫발을 내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순간 신앙에서 초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8) 라는 말씀은 이를 두고 하신 경구입니다. 스스로 신앙의 스승이며 완성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현대판 바리사이가 되고 맙니다.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고질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녔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한 그녀는 반신반의 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온전히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 상태에 머문다면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러 세웁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마지못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묵상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옳다면 왜 굳이 부끄러워 숨으려하는 그녀를 여러 사람들 앞에 불러 세우셨을까요? 그녀의 굳은 믿음을 칭찬하시고자 함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일까요? 둘 다 아닐 겁니다. 그녀에게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래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점이 뛰어난 예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지나치면 억누르시고 부족하면 북돋우시는 지혜의 스승이십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적극적 믿음에는 강아지라는 비유 말씀을 하여 영적 수모로 가르치시고 하혈하는 여인에게는 칭찬으로 믿음을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두 여인 모두 모범적인 믿음을 지녔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변치 않는 믿음을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라는 말씀 속에는 앞으로도 그 믿음을 잃지 마라는 당부가 담겼습니다. 평화는 믿음의 지속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의 믿음만으로 다 알았다는 만족감에 빠지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혈하는 여인처럼 신앙의 익명성 뒤에 숨어버리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한 발 뒤로 빼어 굳이 나서지 않고도 묻어가려는 익명성입니다. 그러고서는 남들에겐 지나치게 나댄다고 눈을 흘깁니다. 아니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처럼 불꽃 같이 일어나 봉사에 덤벼들기도 합니다. 그러고선 모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모두 예수님의 눈에는 합당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샬롬’이 결여된 2% 부족한 믿음일 뿐입니다. ‘샬롬’은 매순간 주님과 함께 만나는 일에서 유지됩니다. 진정한 ‘샬롬’은 진행형 동사이지 명사적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이 지레 짐작하는 믿음은 곧 한계에 부닥칩니다. 성장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경우에는 나대기도 하고 어느 경우에는 익명성에 숨게 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포기하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경천지동 할 만한 소식을 내어 놓습니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 새로운 진리입니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이 이 가르침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님께서만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말씀 한 마디로 그 아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참고 열왕기상 17,21; 열왕기하 4,34)

  이렇게 ‘샬롬’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지레 짐작하지 않고 하느님을 모른다고 고백할 때라야 다가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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