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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9강: 처음 여섯 봉인(요한 묵시록 6장)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6 조회수492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9강: 처음 여섯 봉인(요한 묵시록 6장)

 

 

+ 찬미 예수님

예,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지난 시간에 제가 마치면서 그런 삶의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꿋꿋하게 견디어

내서 어떤 승리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우리의 모습으로 살아가자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승리하신 한 주간 되셨습니까? 다 승리하셨어요?

뭘 승리하셨어요? 잘 참았어요? 종교는 무조건 참는 거 아닙니다.

눌렀어요?

 

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마는 우리가 6장의 순교자를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

순교자라는 것은 참아야지, 참아야지, 눌러야지. 이런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목숨 내나 놓고 내가 정말 온 몸을 바쳐서 무엇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신자분들 중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것을 뭔가를 참아내는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 분들이 계신데 고것은 약간 좀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지 않는가?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가치를 순교자,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드러내는 그 어떤

일을 찾아 나서서 그것을 할 때 우리에게 부딪치는 어려움 그것을 견디고, 참고,

힘겹게 이겨내야 하는 것이지 남들이 나한테 뭔 소리를 해도, 불의를 해도, 뭔

나쁜 짓을 해도 "참자, 참자, 내 하나 참으면 세상이 조용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해 버리면 이것은 도 닦는 거죠.

 

예,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죠. 불의를 보면 항거하고,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고,

그거에 대해서 외칠 수 있고, 그런 누가 목에 칼을 갖다 대면 뭐 "죽여라!"라는

배짱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요즘 세상에야 목숨 내걸고 이렇게 한국 사회는 아닙니다마는 세계 곳곳에는

목숨 내걸고 아직까지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죠? 우리는 우리

삶 안에서 어떤 것을 내가 적극적인 행위로 표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오늘 6장 이제 구체적으로 읽어봅니다. 6장을 읽어보는데

자, 6장 1절을 한번 보면요.

* 묵시 6,1: 나는 어린양이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뜯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 하나를 뜯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섭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처음 시작을 합니다.

우리는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 뜻이 뭔지.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승리에 대한 찬미고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그죠?
하면 읽을 필요 없어요. 이제 이거 읽을 필요 없는데 인제 구체적으로 요 단어가

또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연 설명이 됩니다. 

 

구체적인 틀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 봤습니다. 뜯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과 일치,

구원, 기쁨, 승리,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죠.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표징들이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 묵시 6,1: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오너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오너라.' 장소 이동입니다. 천상에서 어디로? 지상으로.

지상의 어려움, 힘겨움으로 옮깁니다. 잊 이 세상을 한번 보자 이겁니다.

그런데 '오너라'라는 이 동사가 요한계 문헌에 아주 중요합니다.

'오너라'라고 번역이 됐는데 요거를 요한 묵시록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게

뭐냐하면요. 요한 묵시록에서 한번 보자면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주 예수여 오소서!" 여기서는 이제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오너라, 오라. 뭐 할라구? 하느님을 만날라고, 하느님의 뜻이 뭔지 한번

살펴보라고 그 초대를 받는 어떠한 이 성도들에 대한 초대죠.

 

그런데 이 성도들이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에 가면,

"주 예수여 오소서!" 서로 오라고 합니다. 서로 오라고.

이 '오너라'라는 표현은 예수 재림을 통해서 인간과 온전히 하나되는 하님의 모습

이것에 대해서 중요한 동사가 요한 묵시록의 '오너라'입니다.

 

* '오너라'의 의미: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인간과 온전히 하나되는 하느님의 모습

 

여기에 온전히 하나 되는 하느님의 모습. 여기에 요한 묵시록을 보면요.

이 예수님과의 만남이죠. 같을 재림이나 같습니다마는 만남입니다.

예컨대 제자를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어떻게 불렀습니까? 

 

다른 공관 복음 세 개를 한번 보면 어떻게 불렀냐 하면, 예수님이 가기다가,

이렇게 호수 가를 걸으시다가 "나를 따라라." 그러니까 확 따라가고. 그죠?
그런데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왜 밤새 물고기 잡았는데 못 잡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저쪽에 한번

쳐봐다. 그죠? 그러니까 밤새 애썼습니다마는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한번

쳐보겠습니다. 그리고 잡아 올리니까, 놀래고, 나를 따라라 그러니까 다 버리고

예수님 따라갔다.  이런 식의 공관복음은 표현됩니다. 그죠?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 가가자 어촌에 가 보십시오.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그 어부들 그물 손질하고 있고 아무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이렇게 푸념하고 있는데 여러분들 지금 여기 않아 계신 분이

가셔가지고 "조기 한번 쳐보세요." 라고 말하면 그말 듣고 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 예수님은 직업이 뭐였겠습니까? 모르죠 뭐.^^*~~~

요셉 성인께서 목수라는 표현을 쓰는데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요셉의 어떠한 직업을

영어로 옮기면서 목수라는 단어로, 영어로 옮겨 버렸어요. 그래서 목수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요셉 성인이 가지고 있었던, 유다의  그 표현은 뭐냐하면,

건축업과 관련된 거예요.

 

나무만 만지는 것이 아니라 돌도 만지고, 집도 짓는 그런 직종입니다.

자, 그 나자렛에서 커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컸는 예수님께서 뭐 성서에는

낚시질 한번 하시지 않는 걸로 그렇게 표현 되었는데 그런 분께서 "저기 한번

쳐봐라." 이런데 그 말을 듣고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러면 제가 만약 어부 전문가라면 "웃기고 환장하겠네."라는 게 내 안에서 이게

먼저 올라오지 않겠는가? 자, 공관 복음엔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라고 제가 적었는데 예수님이 가서 직접 제자들 보고 오라는 말은 안

하셨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요한의 제자 둘이 가가지고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답답하면 니가 와서 내 삶을 보라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너 자신의 장소 변화, 장소 이동, 너 삶의 자리의 이동입니다.

 

 

 

이동해서 어디로 가느냐? 만남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느님의 거처로 갑니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 저 뒤에 가서 21장에 보면, 그 천상 예루살렘을 처음 설명하는

거기에 하느님의 거처, 하느님 백성이 머무는 거처가 있습니다. 그 거처로 와야

되는 거예요. 이 오너라라는 동사를 가지고 계속 우리가 봉인을 뜯을 때마다

'오너라, 오너라.' 하는데 이것은 뭐냐? 자기 삶의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떠나서 하느님의 것에 귀를 기울여라라를 것입니다.

 

자, 지금 봉인을 뜯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려고 해요. 막 예수님은 주고 싶어

그런데 니 혼자 떠들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다. 내 삶의 자리 꿋꿋이 가지고 있겠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금부터 6장부터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읽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가끔씩 제가 강론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 정말 답답한 느낌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못 알아 듣는 것이 아닌 그건 뭐 제가 말주변이나 제가 말하는 어떤 방법

이나 이런 것이 부족해서 못 알아들으실 수 있겠지요. 그것이 두렵고 힘든 게 아니라

다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거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할때.

 

그게 제 말이 아닌데. 신부들은 강론할 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거든요.

자기 말을 가르치면 이건 잘못되죠. 가끔씩 저도 막 이래 올라가다보면 제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반성이 되는게 아, 강론은 공식적인 어떤 설교의

자리이기 때문에 공식적 가르침을 말씀드려야 되는데 자기 신변 잡기나 뭐 이런

식의 자기가 묵상하고 개인적인 생각들을 전해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죠. 강론은.

 

그런데 공식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는 못 받아들이

겠다. 아, 그때 되게 두렵고 좀 떨려요. 아, 들을 귀가... 그래서 복음서에도 그렇고

요한 묵시록 일곱 개 서간에서도 그렇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 성령의 말씀을

들어라. 귀를 열어야 됩니다.

 

자, 지금 6장부터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바뀔 수 있도록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이 6장부터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오너라' 그러는 거는 만남입니다.

 

더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 하시고 계시고 동시에 우리는 그런 초대 하시는

예수님을 내 안으로 다시 모시기 위해서 우리가 떠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 역시

공생활 시작하시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당신의 삶의 자리로 온전히 떠나셨습니다.

 

 

떠나셔서 거기서 유혹을 받으셨어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나?

우리도 광야로 가야 되는 거지요. 우리도 떠나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때 마을 안에서는 거의 치유 안 하십니다.

마을을 떠나실 때, 마을 어귀에서 하십니다. 무슨 의미냐?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고정 관념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장소적 변화도 되게 특이해요. 복음서가. 그 마을, 그 인간적인

틀, 인간적인 고정 관념을 떠나서 정말 새롭게 내가 깨어지고 열려지고 있지 않을

때, 정말 내 삶의 자리가 새 하늘, 새 땅이 되지 않을 때는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도

나는 받아들일 수 없고 하느님도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내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꿋꿋이 붙들고 있는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이 이래라 저래라 막 끌고 다니시는

분이 아닌 것이죠. 자,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 '오너라'

라는 이 동사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 묵시 6,2: 내가 또 보니, 흰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관을 받자, 승리자로서 더 큰 승리를 거두려고 나갔습니다.

 

자, 이제 첫 번째 등장하는 흰 말, 그리고 그 위에 탄 기사.

이게 문젠데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다 봤습니다.그죠? 묵시 문학 할 때

상징들의 개념에서 흰 색깔도 봤고, 흰 말 탄 기사도 조금 이야기를 했었고,

흰색 하면 떠오르는 거? 승리, 부활,

 

* 흰색: 승리, 부활을 상징함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지금 첫 번째 흰 말, 흰 말 위에 탄 기사가 나타났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펼쳐지는데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붉은 말 나오고

검은 말 나오고, 그 다음에 푸르스름한 말이 나옵니다.

 

* 묵시록 6장의 말: 흰말-> 붉은 말 -> 검은 말 -> 푸르스름한  말

 

이 첫 번째만 하얀 색이고 나머지 세 마리 말은 검은 거, 푸르스름한 거, 붉은 거.

이거 어떤 것들입니까? 이 색깔들은? 우리가 다 봤습니다. 그죠?

죽음과 기근과, 굶주림 뭐 이런 거. 안 좋은 것들이예요.  그런데 이 흰색은

좋은 거죠.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왜 같이 있을까? 네 마리가?

이 네 마리, 네 명의 말탄 기사 이것은 어디서 왔을까?

 

이 첫 번째 말과 첫 번째 기사하고 이 세번째 말하고 세 번째 기사를 같이 놓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성경 해석 학자, 해석하시는 분들이 여기에 대해서

갈등하시는 분이 많아요. 흰말 이거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왜 나쁜 것들 하고 같이 있는가? 뭐 까마귀 속에 밸로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흰말이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 기쁨, 하늘의 영광 이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두 의견이 갈립니다. 자, 먼저 이 네 기사, 네 말이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한번 보자면, 요한 묵시록 저자는 구약 전통에 아주 뛰어나고 잘

알고 있는 그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네 말, 네 기사가

나오는 것은 즈카르야서에 나옵니다. 즈카르야서에 보면 어떤 구저리 있냐하면,

 

* 즈카 1,8: 내가 보니, 붉은 말을 탄 사람이 골짜지의 도금양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그 사람 뒤에는 붉은 말들과 검은 말들과 흰말들이 서 있었다.

자,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같이 있죠? 여기도.

 

* 즈카 1,9-11: 그래서 내가 "나리, 저것들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나와

   이야기 하던 천사가, "저것들이 무엇인지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도금양나무 사이에 서 있던 그 사람이, "이것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두루

   다니도록 보내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말 탄 사람들이 도금양나무 사이에

   서 있던 주님의 천사에게 말하였다. "저희가 세상을 두루다녀 보니, 온 세상은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자, 일단은 즈카르야서의 전통을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가지고 왔다면 이 네 말과

기사는 하느님이 파견하신 거죠.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 네 말과 네 기사: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파견함

 

다시 돌아가서, 문제는 이 흰색, 흰말입니다. 네 기사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흰말에

대해서 첫 번째가 사악한 힘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흰색과 전혀 반대

되는 개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흰색은 기쁨이고, 승리이고, 영광이고 그런데

왜 사악한 힘인가?

 

여기 뒤에 보면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다시 돌아가서 보면, 활을 가지고 있어요.

* 묵시 6,2: 또 내가 보니, 흰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관을 받자, 승리자로서 더 큰 승리를 거두려고 나갔습니다.

 

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전쟁, 싸움 이런 쪽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거죠. 왜 전쟁과 싸움인가? 왜 사악한 힘이라고 했는가? 사악한 힘이

너무 부정적인데 좀 뭐라고 그럴까요? 폭력? 뭐 사악한 힘이라고 합시다.

일단 그런 나쁜 어떤 전쟁과 같은 그런 어떤 분위기를 흰색의 말이 먼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에제키엘 5,16-17을 보면,

 

*에제 5,16: 너희에게 비참한 굶주림의 화살, 곧 너희를 파멸시키려고 멸망의

  화살을 쏠 때, 나는 너희의 굶주림을 더욱 심하게 하고 너희의 양식을 끊어

  버리겠다.

 

이게 뭐냐? 흰말을 탄 기사는 활을 가지고 있다.이 활은 하느님의 심판의 어떤

상징입니다.지금 에제키엘서 방금 제가 읽었던 것. 굶주림? 더 심하게 합니다.

굶주림의 화살로. 이게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이런 심판을 내릴 때

누구에게 갈까요?

 

하느님의 어떤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스르는 사람에게 지금 굶주림의 화살을,

마지막 예언의 심판의 개념이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흰말 위에 있는 이 기사는

활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은 승리, 기쁨을 노래한다기보다는 뭔가 지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와 싸울려는 어떤 자세. 그래서 이 사악한 힘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마는 그럼 지웁시다. 무슨 힘으로 할까요? 무슨 힘?

 

 

흰색이라는 건  보편적으로 유다 묵시 문학 안에서 승리, 기쁨, 영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마는 지금 요한 묵시록의 문제는 이 붉은 말, 검은 말, 푸르스름한 말하고

같이 사용되기 때문에 이걸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심판, 징벌로 이해해 보겠다.

 

이 에제키엘서의 굶주림의 화살, 하느님의 심판 그 개념과 연결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우리가 원래 생각 했듯이 승리, 영광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이거는 어떻게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한가? 이거는 두 개가 좀 극단적입니다.

좀 대비되는 그런 개념입니다. 이 해석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자, 우리 지난 시간에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개 대접의 시르즈를 쭉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서 출발점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천상이라고 그랬죠?
천상은 하느님과 일치, 영광 그리고 찬미의 노래가 나오죠. 그리고 끝부분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 모든 시리즈의 끝이? 구원이라고 그랬죠?

 

구원의 자리에서 일곱 개 대접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은 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찬미 드리고, 영광 드리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 크고도 놀랍다."고 하면서 그죠? 그런 차원에서 그러한 징벌을 이야기 하고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어떤 문제가 무서운 징조를 이야기 하기 전에 출발점을 일곱

개 봉인의 시작하는 데서도 흰말로 출발하면서 승리와 영광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런 승리하는, 영광의 그 어던 전제하에서 세상적 어려움을, 하느님의 징벌을 

이해사기를 바란다라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가 아닌가라고 우리가 해석해

볼 수가 있습니다.

 

* 흰말의 의미(6장): 승리하는, 영광의 전제하에서 세상적 어려움(하느님의 징벌)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라는 의도로 추측

 

 

그래서 첫 번째 말과 이 말은 분명히 다릅니다. 카테고리가 다르게 잡혀 있었는데

하나는 하느님의 심판, 징벌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아마 제 생각으로는 이것(승리,

영광)이 더 가깝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승리, 영광을 전제로 해서 나머지 어려움들을

한번 바라보자라는 것이 이 말의 어떤 네 말을 이야기 하는데 필요한 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 계속해서 보자면요. 두 번째 말을 한번 보겠습니다.

* 묵시 6,3: 어린양이 둘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라는 동사는 유념하시고 만남이라는 것, 내 삶의 자리를 떠나야 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뭔지를 열려 있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시구요.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만남에 대한 설레입니다.

 

* 묵시 6,4: 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

  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

 

붉은 색은 무엇을 뜻한다? 요 글에 나옵니다.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

 

자, 사람을 살해하는 전쟁입니다. 아까 첫 번째 해석에서 활이 나와서 어떤 하느님의

심판, 징벌을 얘기 했는데 여기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뭐냐? 살해하는 전쟁은 뭐냐?

요거는 마르코 복음을 한번 볼께요. 마르코 복음과도 흡사한데 일단 마르코 복음을

보면,

 

*마르 13,8: 민족과 민족이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 마르코 복음 13장의 메세지

   유다의 고유한 메시아 시대가 오기 직전 전조를 드러내는 묵시 문학적 표현

 

이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맥락의 논리를 요한 묵시록 6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붉은 말을 통해서 서로 살해하는 것 죽이고 막 없애고 그러는 무시무시한

것은 보지 마시고 우리의 관점은 어디에? 메시아가 오기 전의 어떠한 징표로써

드러난 사건.

 

이 마르코 복음 13장에서도 방금 읽은 대목에서도 "그러나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불행이 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서 묵시

문학의 특징을 우리가 알아 듣기 위해서 한참 전에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불행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하느님의 구원을 미리 알려주는 징표로써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불행, 어려움이 다 지나가고 나서 하느님의 영광, 메시아가 도래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요한 묵시록 6장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그러한 살해하는 이러한 장면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는,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계셔요. 붉은 말 같은 거는 서로

죽인다. 뭐 그리고 뒤에 보면 칼도 있지요?  그는 큰 칼을 받았다. 뭐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로마 시대적 상황, 로마와 연결할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가 죽이고 막 이런데 그런데 그쪽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그건 정말로

죽이고 박해를 하기 위한 것인데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로마의 억압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억압이 아니라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지나가야 할 과정,

유다 묵시 문학의 전통적 표현이라는 것이죠.

 

* 묵시록 6장의 '억압':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지나가야 할 과정으로 유다 묵시

   문학의 전통적 표현

 

정말로 뭐 죽이고 칼로 살해하고 이러한 어떤 장면이 실제적으로 드러난다기 보다는

아, 메시아가 등장하는 하나의 고유한 문학적 표현이다.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

습니다. 자, 계속해서 5절을 보자면,

 

* 묵시 6,5: 어린양이 셋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오너라'라는 표현이 계속되죠? 계속 보셔야 됩니다. 어디로 오너라? 어디로?

첫 번째 흰말에서도 뭐 승리, 제가 그쪽으로 더 해석하고 싶다고 그랬습니다. 그죠?

승리, 영광, 기쁨 이게 뭐냐? 하느님의 천상 일치, 하느님과의 만남. 그죠?

 

두 번째 붉은 말, 무슨 시대가 도래한다구요? 붉은 말을 통해서?

메시아, 메시아에게로 가는 것. '오너라, 오너라.' 이 세 번째 지금 '오너라'라는 게

우리 삶의 자리를 떠난다라고 그랬죠? 하느님 뜻에로 가는 것. 어디로?

하느님과 일치하고 메시아를 만나러 가고 그쪽으로 초대를 하는 거예요. 자꾸.

그런 분위기로 이해 하시면 되겠습니다.

 

* 묵시 6,5: 내가 또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

   그러나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마라."

 

참 어려운, 갑자가 뜬금없이 밀, 보리, 올리브, 포도주 이렇게 나타납니다.

예, 여기 보면, 검은 말은 저울을 가지고 있어요. 뭔가 측정하는 거죠. 그죠?

측정하는데 뭘 측정하는가? 밀이 나오고, 보리도 나오니까 뭐 한되, 두되도 나오고.

 

한되가 어느 정도죠? 저는 전혀 몰라요. 요즘은 키로그램으로 많이 쓰는데, 고기

같은 것도 보면 몇 근이라고 하고. 우리 청년들하고 어디 갔는데 고기 몇 근 주라고

그러는데 도무지 개념이 저는 잘 안잡히는데 몇 근이.

 

예, 그런 어떤 이 사람들도 요한 묵시록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의 어떤 기준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요기에 '되'라고 써 있는 게 '코이닉스'라는 단어가 사용이 됐는데

요것이 약 1리터 정도. 그러니까 밀 한 되가 1리터 병 거기다 넣으면 어느 정도 그런

양이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 밀 한되에 하루 품삯이라고 되어 있지요?

 

요거는 '치페로(키케로)' 로마 문인 그 사람의 어떤 표현을 보면, 그 표현과 한번

연결해서 생각하자면, 밀 한되는 당시 최저 임금의 16배, 최고 임금의 8배에 가까운

엄청난 지급 일당이예요. 이 지금 저울로 검은 말 기사가 저울로 가지고 잰 것이,

임금이 쉽게 얘기해서 한참 더 풍부하고 더 엄청나게 많다는 거죠.

 

그 양을 지금 재고 있어요. 거기다가 두 번째로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도 해를

끼치지 마라고 돼 있죠? 왜 뜬금없이 포도주 올리브가 왜 나왔을까?

이 또한 구약 전통을 봐아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 저자는 아마도 우리

요즘 시대에 살았으면 논문을 기가 막히게 쓴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짜집기를 정말 잘해요. 구약의 모든 곳곳에 것을 빼와가지고 짜집기를 정말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구절, 한 구절 나올 때마다 구약 전통, 유다 전통에 대해서

특별히 묵시 문학 전통에 대해서 한번 살펴 봐야 되는 것이 이 어떤 요한 묵시록을

읽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잘 공부를 안 할라고 그래요. 공부가 깊다기보다는 넓다라는

표현이 더 맞아요. 할께 너무 많아요. 그래서 열 방면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되

때문에. 우리가 이 시간에는 그렇게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요한 묵시록이 어떤

의미라는 것을 전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요한 묵시록을 공부할려면 구약 전체, 유다 전통, 그리고 묵시

문학적 전통에 대해서 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많이

가겠죠? 예, 요 방송 다 들으시고 나중에 한번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 올리브 기름과 포조주라고 돼 있는데, 요건 요엘서를 보겠습니다.

 

* 요엘 1,10-11: 들은 황폐해지고 땅은 통곡한다. 곡식 농사는 망하고 햇포도주는

   말라 버렸으며 기름은 떨어졌다. 밀고 보리를 생각하며 농부들아, 질겁하여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들아, 울부짖어라. 들의 수확이 다 망가졌다.

 

이게 뭐냐? 완전히 망했죠? 지금 여기에 밀과 보리, 포도나무, 올리브 싹 다 지금

망해버렸습니다. 이게 메시아가 오기 전 징조, 혹은 하느님의 심판을 지칭하는

요엘서의 어떤 부분입니다.

 

* 요엘 1,10-11: 메시아가 오기 전 징조, 하느님의 심판을 지칭함

 

그런데 여기 묵시록에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는 해를 끼치지 마라.

자, 검은 말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 검은 말의 의미: 결핍, 굶주림을 의미함

 

자,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묵시 문학에서 검은 색은

굶주림, 결핍, 기근을 의미했었는데 지금 밀 한되, 하루 품삯이라고 했는 것은

임금이 많다고 했지요? 풍부함입니다. 그런데 올리브와 기름과 포도주도 그런

기근, 굶주림이면 이건 망해야 되는 건데 해르 끼치지 마라라고 합니다. 뭐냐?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검은 말, 검은 색을 완전히 뒤없는 말이죠. 풍부함.

망하게 하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요엘서에서 말한 것을 하지 마라.

메시아께 오너라. 메시아를 만나라. 메시아를 만나는 그것은 어떻다구요.?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계속해서 지금 첫 번째 말에 대해서 아까 두 가지로 해석을 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심판, 징벌, 두 번째는 승리, 영광에 대해서 했습니다. 어느쪽 해석을 좀

따르고 싶습니까? 예, 승리, 영광 쪽으로.

 

지금 이 표징들은 무시무시한 거를 드러내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전쟁, 사람

살해하고, 검은 색의 기근, 굶주림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실상 그 안에 흐르는

내용은 승리하는 것을 연속해서 계속해서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는 문학적 표현

이라고 그랬습니다. 그죠? 그러니까 자꾸 승리, 기쁨 쪽으로 엮어가는 거예요.

 

그런 어떤 숨은 뜻을 우리가 점점점 이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장면이 나타나가지고 잘못 요한 묵시록을 해석하는 분들

많잖아요. 그죠? 종말 때는 이렇게 사람 죽인다고 그러구 막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 다 사이비죠? 그거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느님이 있는데 기뻐해야지 왜 우리가

징벌 받습니까? 그죠? 물론 뭐 나쁜 짓하면 벌 받겠습니다마는.

 

예, 그래서 지금 풍요로움에 대해서, 세 번째 기사에 대해서 우리가 봤습니다.

자, 네 번째 보면 6장 7절에,

* 묵시 6,7: 어린양이 넷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넷째 생물이 "오너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너라'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 묵시 6,8: 내가 또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습니다.

자, 푸르스름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갈 때까지 가는 거죠.

 

 

* 묵시 6,8: 그리고 그 뒤에는 저승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으니, 곧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권한입니다.

 

이 저승이라는 표현, 죽음 이후의 어떤  세상 여기에 대해서 구약의 어떤 셰올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것을 연옥하고 연결하시면 안 됩니다. 이 셰올

이라는 것은 죽음 이후에 구체적 어디 정해지지 않은 뭔가 정해지지 않은,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상을 말할 때 아직까지 신학적으로 뿌리 내리지 않은 개념으로 구약

에서 사용되었어요.

 

* 저승(셰올): 죽음 이후의 어떤 세상

 

그러나 거기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없는 것. 이것을 우리가

중세기에 생겼던 연옥이라는 교리와 연결해서 거기가서 심판 받고 뭐 어쩌고,

깨끗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바로 연결해 버리는데 성경에는 연옥의 그런 구체적인

내용은 있지 않습니다. 셰올은 연옥으로 연결하시면 안 되겠습니다.

 

다만 죽음 이후의 세상, 어떤 장소. 여기에는 하느님과의 어떤 관계가 없는, 그래서

심연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구요. 바다 그런 혼돈 뭐 이런 개념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정도로 우리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문제는 죽음 다음에 저승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 묵시 6,8: 그들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으니, 곧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권한입니다.

 

자, 이건 또 뭔가? 이 죽음, 저승이 있고 그 어떤 죽이는 권한이 칼, 굶주림, 흑사병

다 나왔습니다. 이제는. 요 네 가지도 에제키엘서에서 따 온 것입니다.

 

* 에제 14,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내가 예루살렘에 네 가지 해로운

   심판, 곧 칼과 굶주림과 사나운 짐승들과 흑사병을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잘라 낼

   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느님 심판에 대한 거예요. 요 구절은 왜 나왔는고 하니, 예언서에 하느님의 심판,

심판을 왜 내립니까? 하느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 예언서의 '심판'은 인간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려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래서 돌아오라는 거죠.

 

요한 묵시록 저번 시간에 봤던 구조에서도 침묵기가 있었죠? 각각 일곱 개의

시리즈 안에서 일곱 번째 봉인, 나팔, 대접을 하기 전에 침묵기가 있었어요.

회개하고 돌아 오라구요.

 

여기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네 가지 에제키엘서에서 나온 것 이것은 우리가

네 번째 푸르스름한 말이 죽음을 의미하고 저승이 그 뒤에 따른다고 하고

하지마는 결국에는 이 칼과 굶주림과 사나운 짐승과 흑사병을 통해서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세상 끝날에 대한 종말론적 경고.

 

그래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어떤 강한 경고가 있습니다. 왜? 메시아의 시대는

풍요로우니까. 메시아가 도래하면 정말 올리브, 포도주 뭐 이런 거 그죠?

아까 뭡니까? 올리브, 기름, 밀, 보리, 이런 것들이 풍성하게 있고 거기에는

메시아에 대한 승리, 기쁨이 흰말에서 시작했다라는 것 머리에 두시고요.

그런 기쁨이 있으니까 '오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이제 문제입니다.

 

* 묵시 6,9: 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이제 다섯 번째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인제 어렵기 시작하는데 자, 앞의 네 개는

메시아 시대가 이런 것이니 희망을 가져라입니다. 가질려고 하니 실제로 어떤 모습은

힘들어요. 힘든 모습이 다섯 번째 이 봉인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제단 아래에 있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이제 울부짖는 것이죠. 여기는 이것도 역시 우리가 봐야 되는

게 마르코 복음을 봐야 됩니다.

 

* 마르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

 

이 모습 보십시오. 왜 박해를 받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마르코 13장은 메시아 도래의 징표로서의 어떤 박해와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의 어떤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가 박해를 받고 힘들어 하고 의회에 끌려가서 뭔가 증언하는 이 과정은

그래서 지금 그 과정과 같은 맥락에서 이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울부짖는 것은 메시아 시대에 대한 간절한 바램 표현이죠. 설레임이죠.

제발 오라라는 강한 열망을 지금 드러내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 강한 열망을 누구를 통해서? 순교자를 통해서.

지금 이거 어떻게 되냐하면, 뒤에 계속해서 한번 읽어 보면요.

어떻게 되어 있냐하면요.

 

* 묵시 6,10: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자기들이 흘린 피, 순교자를 통해서. 자,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고, 이거를 바라고

강열한 열망을 왜 요한 묵시록은 순교자를 통해서 표현했는가? 정말 기뻐서 북치고

장구치면서 제발 빠리 오라고 그런 식으로 조금 아름답게 표현하면 더 좋을 것인데

왜 순교자의 모습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를 이렇게 열망하고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5장으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하느님을 만나는 것.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의 뭐를 통해서? 어린양이 흘리신 피를

통해서. 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요한 묵시록은 아주 중요한 거예요.

 

요한 묵시록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이 하느님을 만나는 거, 메시아를 만난다는

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살다가 가신

어떠한 그러한 방법, 그것을 통해서 만나야 된다. 그것은 십자가상 죽음이다.

 

그러니까 그거와 연결되는 것은 뭔가? 순교자의 표징을 써서 사용해가지고 이제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으로 지금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을 표현한 거죠.

피를 흘린다. 그런데 자꾸 순교자 그러면 피, 살해 막 이쪽으로 가는데 순교자의

원래 의미는 피와 연결 됐다기보다는 뭐와 연결이 됐냐하면, 증언입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증언. 자,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다시 한번 9절을 보면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증언입니다. 순교자를 보면요.

 

 

 

자 이 두 조건이 순교자를 만드는 조건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뭡니까?

요한 묵시록에 보면, 요한계 문헌 전체를 보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라고 그러죠? 그리고 이 하느님의 말씀이

저 19장에 가보면요 백마탄 기사가 나타나는데 그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백마탄

기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거죠.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순교자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들입니다. 요거를 예수님에 대해서 무작정 그냥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라고 무조건 이야기 하고 그냥 이야기 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그 예수님에 대한 것을 어떻게 내가 표현해내는가? 내 삶으로 그런 어떤 방식

으로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다르게 만나요.

 

한분 예수님을 우리는 우리가 해석하고 우리가 이해한 한분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

모십니다. 그리고 그 우리의 증언의 해야 됩니다. 친구따라 강남 가듯이 성당 가소

신앙 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하느님, 예수님을 어떻게 이 세상에 드러낼

것인가? 자기들이 증언해야 됩니다. 순교자의 조건입니다. 요기서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떻게 된다구요?

 

이 피는 구약 성경에서 영혼입니다. 그리고 영혼이고 생명이죠. 영혼, 생명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창조주 하느님이시죠. 그 하느님을 만나는 것.

*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온전히 받아 모시는 것)

 

피를 흘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의 증언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내가 받아들이는 그 받아들임을 통해서

일치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순교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는 그러한 자체가 완성이 아니죠.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그 언제가 무엇이냐 하면,

완성의 때입니다. 이렇게,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데 당신과 일치하고 있는데 언제 우리의 완성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언제 메시아의 시대의 도래를 확실하게 보여 주시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 두 번째 말, 세 번째 말, 네 번째 말 이래 쭉 나오느데 메사아 시대의

간접적 표현, 그거? 나 확실하게 모르겠다. 나 열심히 살고 있지마는 좀 보여 달라.

언제냐? 그게? 그러니까 답이 있습니다. 11절에,

 

* 묵시 6,11: 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희고 긴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자, 이게 뭐냐? 순교자를 통해서 그 어떤 죽음, 피흘림, 하느님과의 일치 그러나

그 일치는 하나의 부분이죠. 하나의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죠. 그러나 그 수가

찬다는 표현, 수가 찰 때까지는 보편적 구원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 앞에 엎드릴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정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때까지 세상의 완성,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보십시오.

 

그래서 종말이 시작됐고, 하느님 나라는 시작됐고, 그래서 우리가 이 하느님과

일치는 시작이 되었지만 그 완성은 정말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서 요한

묵시록은 열어 놓고 있다라는 정도로 우리가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12절에서 14절로 바로 넘어가서,

 

* 묵시 6,12: 어린양이 여섯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에 나는 보았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는 털로 짠 자루옷처럼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되었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은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 요 대목은 어떻게 보시면 되냐 하면, 지금 하늘의 하늘의 별이고 뭐고, 하늘이

접히고 그죠? 두루마리 말리듯이? 요거는 창세기 창조 설화에 창공이 펼쳐지죠?

이 창공이라는 단어가 뭐냐하면, 확장이라는 단어입니다.

 

* 창세기의 '창공': 확장이라는 의미

 

그러니까 유다 사람들의 우주관은 이 공중의 창공이 무한히 펼쳐지는 것처럼 생각

해죠. 그럼 펼쳐졌으니까 말아야지요. 그러니까 '만다'라는 표현 자체는 자기들의

우주관이 그렇게 펼치는 것이 창공이었기 때문에 묵시 문학적 표현이죠.

 

이거는 무슨 소리인가? 방금 창조 이야기를 제가 했다시피 창조의 것을 지금 새롭게

지금 혼돈으로 바꾸고 있는 거예요. 메시아 시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헌 것, 옛날 거는, 창조가 된 것 그런 것들을 다

이렇게 어떤 의미에서 없애고 새로운 땅, 새 창조 요게 묵시 문학적 표현이거든요.

 

옛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왔다. 예, 그러기 위해서 그렇게 옛 것이 막  말려가고 해야

되겠죠? 떨어지고 창조된 것들이 지금 사라집니다. 나중에 가면, 요한 묵시록 저 뒤에

가서 새 하늘, 새 땅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차원이죠. 자, 그러는 차원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이게 오면 누가 문제냐 하면,

 

* 묵시 6,15-16: 그러자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 동굴과 산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다. "우리 위로 무너져,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다오."

 

이게 뭐냐하면, 사회 모든 계층을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계층이 어떻게 된다?

숨어요. 숨어버립니다. 이 숨는다는 단어가 머리에 딱 떠오르는 게 어느 누구입니까?

아담, 하와죠? 하느님께로부터 숨어버리죠? 이들이 왜 숨습니까? 잘못했기 때문에.

 

그 새 하늘 새 땅에 지금 이 모든 나오는 부자들, 뭐든 모든 사회 계층이 일단 숨어

버리는 것. 하느님의 진노의 날입니다. 하느님의 분노의 날. 저번 시간에 얘기했다

시피 야훼의 날, 진노의 날은 누구에게는 승리의 기쁨이지마는 누구에게는 멸망,

심판이 되죠? 믿지 않는,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그런 어떤 이들입니다.

 

그런 어떠한 이런 숨겨 달라. 이것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느끼는 공포감

이죠. 그러나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고, 열망하고, 정말 간절히 바라면 우리는 누구

처럼 됩니까?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처럼 빨리 좀 와 가지고 메시아 시대 좀

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인제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가서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라고 6장이 끝이 납니다.

 

* 묵시 6,17: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이러한 징벌과 같은 이러한 무시무시한 분위기. 다 무너지는 분위기를 누가 견디어

낼 수 있는가? 견뎌 낼 수 있다. 누가?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고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요거 7장에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봤는 것은 징벌적

모습이지마는 그 내면에 흐르는 것은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는 전조입니다.

 

이 시대가 지나가면 메시아를 만난다는 그런 간절한 바램, 그 어떤 열망, 설레임.

이것이 바로 6장에 녹아져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 또 살아가시면서

예수님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말 기쁜 마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한 주간 살아

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다음 시간 예고: 하느님의 백성,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 요한 묵시록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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