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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고독에 숨어 있는 뜻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10 조회수621 추천수3 반대(0) 신고
체코의 소설가 이반 클리마(Ivan Klima, 1931- )는 그의 자서전적 소설『My First Loves』에서 한 젊은이가 상반되는 감정 때문에 갈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의 친구처럼 성적(性的)으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하고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없이 침묵으로 일관 하고 싶은 심사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아가면서 내면 깊숙이 숨어있던 건전하지 못한 수줍음과 고차원적인 젊잖은 욕구인 고독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망설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후자를 택할 때가 많았다.
복잡하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문화 속에서 고도의 고독을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클리마가 성장했던 것과 같은 사회는 그 반대를 요구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요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 중에도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 하고 따돌림을 받으면서까지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는 오히려 그렇게 고상하게 살지 말고 눈높이를 낮추기를 바란다.
외로움을 고수하기보다는 품위가 없이 행동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자신이 납작 엎드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교회 친구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는 한 자매님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과부로 산 지 7년이 되어 정말로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직후 교회의 여러 친구들이 나에게 준 충고가 기억이 납니다. ‘곧 결혼해야 할꺼야.’ ‘세상에 별 사람 없어’
‘왜 가끔가다가 토요일 밤에 아무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함께 살지 않니?’
저의 나이 또래는 이러한 일을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대한 영성작가의 견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많은 독자를 갖고 있습니다. 답변해 주실 수 있겠죠?”
 
그녀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묻고 있었다.
“대부분의 과부들과 홀애비들이 통속적인 것을 일시적인 만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理想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고, 성적 장애를 의학적인 도움으로 극복하고, 매혹적인 여행을 즐기며,
좋은 집에 살며(항상 젊게 그리고 환한 얼굴로 짝을 짓고),
늙지 않는 온갖 성형술과 체형 교정장치를 다 이용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황량하게 만들어 고통 스러운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영혼이 좌절되지 않고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모두 절망할 정도로 이상(理想)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 영혼의 위엄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고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경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 언론인이 최근에 금욕에 관한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중년이 되면 좋은 일이라곤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아 꿈을 포기하게 되므로
젊어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릴 때에 이상(理想)이 의미가 있다고 썼다.
그녀는 대중가요에서도 노래하고 있듯
나쁜 사랑이라도 전혀 사랑이 없어 보이는 것보다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이 말한 대로
진짜 죄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차선책으로 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다. 또 다른 한 과부가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존경을 받으면서 또 명예를 실추하지 않고 우리 영혼의 진리와 화합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망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끄러워서 하느님의 현존을 살짜기 혼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 갑자기 대단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회초리로 맞고 못 박힐 때의)을 그리지 않고
예수님 당신만 외롭게 팽개쳐진 윤리적인 외로움, 근본적인 외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당신께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대신 죽음을 택하시는 대속(代贖)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피와 외로움의 값을 치르시고서야
몸과 마음이 황량함을 느끼는 고도의 고독을 느끼실 수 있었다.
온갖 고통과 굴욕과 외로움을 무릅쓰고도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당신은 태고의 외로움에 머무셨다.
 
우리들 눈에 최선으로 보이는 것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숨은 뜻이 있다. 현실도피를 하면서 눈높이를 낮출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고, 불의와 타협할 것이 아니라 외로울 각오를 하고, 무사안일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태고의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롤하이저 신부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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