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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미사강론]성베드로와 성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강론[2019년 6월 29일 토요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05 조회수1,914 추천수1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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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96 29일 토요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도행전12,1-11

화답송 : 시편 34(33),2-3.4-5.6-7.8-9(◎ 5ㄴ 참조)

2독서 : 티모테오 2 4,6-8.17-18

복음 : 마태오 복음16,13-19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0624&gomonth=2019-06-2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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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새로운 대주교들을 위한

봉헌된 팔리움 축복과 거룩한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베드로대성당

2019 6 29일 토요일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증인으로써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로서의 여정과 설교에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순교자로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면서 근본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그 증언의 핵심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삶의 증인, 용서의 증인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증인. 그들의 삶은 말끔하고 단순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도 모두 매우 믿음이 깊었습니다. 베드로는 첫 제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요한 복음 1,41 참고). 그리고 바오로는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티아서 1,14). 그러나 그들은 또한 중대한 잘못들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한편 바오로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두 사도 모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는 물음으로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복음 21, 15).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4).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슬퍼했고 한편 바오로는 그분의 말씀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셨고 그들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일어났던 모든 일들 후에 그분께서는 그분의 신뢰를 그들에게 두셨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그분을 부인했고 한 사람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분은 그 두 명의 회개하는 죄인들을 신뢰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깨끗한 이력과 흠 없는 삶을 살았던 온전히 고결한 두 명의 증인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셨을까요? 우리는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요한이 있었는데 베드로입니까, 왜 바르나바가 아니라 바오로입니까?`

 

여기에 위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의 훌륭함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선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밖에 이루지 내지 못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거나 더 선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언제든지 그때가 끝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선함에 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홀로 자족하지 않는 그러나 그분께 자기 마음을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같이 하느님 앞에서 솔직한 사람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 5, 8). 바오로는 자기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고린토 1 15,9)라고 썼습니다. 이 겸손함을 그들은 삶 전체를 통해서 그 마지막까지 지켜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주님을 따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언제나 보잘것없는을 의미하는 자기 이름을 좋아했고 자기 민족의 첫 번째 왕의 이름인 사울이라는 자신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을 버렸습니다. 두 사도 모두 거룩함은 자신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룩함은 콘테스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난함을 날마다 주님께 의탁하는 물음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낮은 사람들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하십니다. 그들을 약함 가운데에서 인내하게 만드신 비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용서였습니다.

 

용서의 증인으로의 그들에 대해 또한 생각합시다. 그들이 실패할 때 그들은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강인한 자비와 만났습니다. 그분의 용서 안에서 그들은 억누를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되돌아 보면서 그들은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을 되돌아 보며 생각했을까요! 바오로는 그토록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인간적으로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실패보다 더 큰 사랑을 만났고 그들의 죄의식까지도 충분히 치유할만큼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 태어남을 체험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합니다. 용서에서.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 재발견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삶의 증인 그리고 용서의 증인, 궁극적으로 베드로와 바오로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그 대답들은 과거의 인물들을 떠올립니다. ,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대신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즉 메시아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기다려지는 분이시고 그분께서는 새로움이시고 하느님의 기름 부으심을 세상에 가져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미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기억되는 먼 저명인사가 아니라 베드로가 친근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증인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유명 인물 이상의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께서는 새로움이십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들이 아니라 미래의 새로움이시며 과거로부터 오는 기억이 아닙니다. 그래서 증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아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러브스토리를 경험하는 어떤 사람입니다. 증인은 결국 이것만을 선포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그분께서 삶의 비밀이라는 것만을 선포합니다. 진실로 베드로는 스승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마태오 복음 16,16). 증언은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일어납니다. 바오로 삶의 중심에서도 베드로의 마음에서 나온 같은 말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바오로는 이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의 서간들에서 거의 사백 번! 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필리피서 1,21). 예수님은 너무나 바오로의 현재이자 미래여서 바오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그의 과거를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리피서  3,7-8 참고)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증인들의 현존 안에서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나는 매일 예수님과 나 자신의 만남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궁금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교회 일들이나 종교적인 뉴스에 흥미를 가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컴퓨터 사이트와 신문들을 열어 보면서 거룩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 차원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론조사나 과거 일이나 통계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종교 담당 편집장들을 찾고 계신 것도 아니고 신문 제1이나 통계상의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날마다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는 증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사도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분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뒤를 돌아 보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중간한 척도에 만족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척도만을 받아들였습니다. , 끝없는 사랑이라는 척도. 그들은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졌습니다(티모테오 2 4,6 참고). 우리의 사랑이 식도록 놓아 두면서 어정쩡한 척도로 사는 미적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은총을 간청하십니다. 매일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분 용서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재발견합시다. 그가 베드로에게 물었던 바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될 수 있도록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고 있지 말고 지고한 가치를 향하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도록 놓아 둡시다.

 

오늘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지명된 대주교들을 위한 팔리움을 축복합니다. 팔리움은 목자가 그의 어깨에 지라고 부름 받은 양들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목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살라는 표징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목숨을 잃어야 하고 목숨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표징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좋은 전통에 따라 내가 따뜻한 사랑으로 인사를 전하는 총대주교청(the Ecumenical Patriarchate) 대표단과 함께 나눕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참석이 우리가 또한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모든 차원의 친교 안에서 온전한 일치를 향한 여정 안에서 또한 노력을 아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함께 모여 하느님과 화해되고 서로 용서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라고 부름 받기 때문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629_omelia-pallio.html

미사 동영상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19/6/29/pietroepaolo.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소리 미사 강론 -> http://www.podbbang.com/ch/177127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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