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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7 - 송봉모 토마스 S.J.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2 조회수749 추천수7 반대(0) 신고
 
- 광 야 -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7


   우리가 욥기를 보게 되면 36장까지 끊임없이 욥이 울부짖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 못 했길래,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런데 38장부터 보시게 되면 하느님이 욥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퍼붓습니다. 쉬지 않고 퍼붓습니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살게 했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가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질문을 38장부터 계속 퍼부어 댑니다.


   조금 전까지는 욥이 퍼부어 댔는데, 고통에 대한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퍼부어 댔어요. 고통의 희생물 이라는 게 억울해서 퍼부어 댔는데 이제 하느님이 계속 질문을 퍼부어 댑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욥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질문은 결코 아닙니다. "네가 세상 물정을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보아라. 땅의 기초를 놓았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의 설계를 놓았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이것은 욥을 가르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욥을 설득하려는 질문도 아닙니다.


   "너는 죽음의 문이 환히 드러나는 것과, 암흑의 나라 대문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  네가 넓은 땅위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느냐? 빛의 전당으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어디냐? 너는 빛을 제 나라로 이끌어 가고, 어둠을 본고장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 네가 그 한 옛날에 태어나 오래오래 살았으므로, 그리고 네가 의롭게 살았으므로 그래 모르는 것이 없다면 대답해 보아라."


   이 질문들은 욥을 아찔하게 만들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질문들입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아낼 작정이냐?"


   도대체 이 질문들이 무슨 뜻인가? 수없이 퍼붓는 이 질문들, 네팔이 나의 팔만큼 힘이 있다는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다는 말이냐? 건방진 … 보이거든 그럼 뭉개어 보아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네가 좀 해 봐라. 하느님께서 욥을 향해 이렇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엇인가?


   욥이 그전까지 던졌던 질문들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우스운 질문이며 의미 없는 질문인가를 내기하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옹기가 옹기 쟁이 보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 주시오. 저런 식으로 만들어 주시오 질문을 했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이제 골프채 잡는 사람이 박세리 보고 "그런 식으로 골프채 잡으면 안 돼." 하면서 충고를 했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또 얘기하면 이제 볼을, 야구 볼을 잡은 사람이 박찬호 보고 "그런 식으로 폼을 하니까 또 지지… 아직도 5승을 못 거두었지…"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 뚜렷하게 얘기했습니다. 이거 외에 뭐 하나 뚜렷하게 대답해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시다가 한번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이 묻는 내용이 "선생님,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그의 부모입니까?"


    "저사람 입니까?" 하는 것은 전통적인 고통관이고, "그의 부모입니까?"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조상 탓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인한 두 번째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세 번째 고통관입니다.


   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장님으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개인처벌을 받아서도 아니요, 집단처벌을 받아서도 아니요, 신비로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대답이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이 장님한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고통이 신비로서 주어졌을 때, 받아들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부터 과연 깨달음이 없이, 깊은 이해가 없이 이것이 얼마만큼, 그리하여 끊임없는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받아들일만한 대답이 없느냐? 개인처벌, 집단처벌, 아니면 신비, 이런 것 말고 정말 이해할 수 있는 고통관이 없느냐?


   그리하여 나오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단련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준다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교육적인 고통관입니다.

 

                   ♠ 예수회 송봉모 토마스 S.J.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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