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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레자 요한의 죽음'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6 조회수671 추천수3 반대(0) 신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6, 14-29)
-유 광수신부-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다.
 
선구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사는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 말씀으로 모두 끝난다.  마르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르단 강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푸는 선구자로 등장하고, 두 번째가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야기로 요한의 일생이 끝난다. 첫 번째 물로 세례를 베풀던 요한 세례자의 활동이 끝난 다음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은 세례성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성체성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또 파견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권력의 핵심부까지 알려졌고, 마침내 최고권자인 헤로데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당신의 활동을 통해서 점점 자라고 있고, 마침내 권력의 핵심부에까지 알려질 만큼 크게 자란 것이다. 나의 믿음도 나에게서 머물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믿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를 위한 이름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는 이름으로 널리 소문이 나야 할 이름이다. 나를 통해서 알려지는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소문으로 알려지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요한 세례자의 존재는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 요한 세례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것을 올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 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예수님이 아닌 요한 세례자의 활동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것을 요한 세례자가 한 것처럼 착각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마르코는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하는 그 말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럼에도 "요한 세례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엄청난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인생관에서 죽지만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인생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아직까지 부활에 대한 확실한 의식은 없지만 마르코는 이 말을 통해서 서서히 부활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서로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반면 헤로데 임금의 생각은 주저함이 없이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헤로데 임금은 어떻게 단정적으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표시가 잘 나타나지 않더라도 누구나 내면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이 평상시에는 잘 안 나타났다가도 어떤 상황에 가서는 자기도 모르게 표출되는 법이다. 속담에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심어 주신 양심을 갖고 있다. 양심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준다. 양심에 따라 옳게 행동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스러움을 느끼지만 반대로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에는 늘 불안하고 불편하고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한 잘못이 드러날까 봐 가슴이 철렁거림을 느낀다. 사람을 죽였거나 강도짓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아 깊은 산중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기를 붙잡으려고 쫓아오는 것 같고, 바람소리가 조금만 세차게 불거나 짐승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하면서 불안해한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사는 법이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견디다 못해 자수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자수는 못했어도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을 때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헤로데 임금이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었지만 자기 말대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딸의 요구로 목을 베게 한 그 죄가 늘 그를 쫓아다녔던 것이다. 그는 비록 임금으로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고 지냈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늘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괴로워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 결과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주저함이 없이 곧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무의식 속에 잠복했던 생각이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헤로데 임금처럼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큰 상처를 한번도 털어놓지 못했기에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것에 꽁꽁 얽매여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어렸을 때의 상처이든, 또는 몇 년 전의 것이든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매듭은 풀어야 풀리는 것이지, 풀지 않은 채 그냥 놔두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라고 말씀하셨다.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둔 비밀은 없는가?  양심에 꺼리는 어떤 것들을 고백하지 못하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죄가 있다면 그것을 진실되이 고백하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본인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 마음에 깊이 간직했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치료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나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괴롭혀 왔던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기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고 그것을 일일이 종이에 기록하여 주님께 기도한 후 태워버리는 작업을 통해서 해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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