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8 조회수533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3주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 것은 어느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것이며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길을 가는 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때에는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란 긴 여정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과연 어디이고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목적지를 향해 가려고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求道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바른 목적을 정하여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正道의 삶이라 하며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은 잘못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의 바른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바른 목표와 길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宗)된 가르침(敎)을 알려주는 것이므로 그래서 이를 우리는 宗敎라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첫 一聲은 바로 “무엇을 찾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기 전에, 교리에 대하여는 완전 백지인 상태에서 요한 복음서를 시작으로 말씀을 공부하며 “무엇을 찾느냐?” 하신 오늘 예수님의 첫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진리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스승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게 “와서 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와서 보아라.” 하신 말씀에 용기를 내어서 요한 복음서를 시작으로 복음서를 몇 번씩 정독하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늘 의문으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첫 번째 의문은 오늘 등장하는 요한의 두 제자입니다.

요한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그중 한 사람은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은 누구일까? 왜 두 사람을 등장시켰을까? 이 알 수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복음에 처음 등장하여 익명의 제자 또는 사랑하는 제자로 주요 장면에 모두 등장합니다.

익명인 알 수 없는 제자 또는 사랑하는 제자가 등장한 경우를 기억나는 데로 더듬어 보면 이 제자는 최후의 만찬에서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직접 여쭤봤으며,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예수님을 따라서 대사제 집까지 함께 간 제자이며, 이 제자는 대사제를 잘 알고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 집으로 들어갔지만 베드로 사도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알 수 없는 제자의 도움으로 베드로 사도가 나중에 대사제집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모습을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곁에서 끝까지 전부 지켜봤으며, 베드로 사도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도착한 제자이며,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곱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주요 장면에 모두 등장하며 그리고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임을 알려주며(요한 21,24) 요한복음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을 저자로 보는 사람들은 요한 복음서를 제대로 검토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오늘은 이를 생각하는 시간을 먼저 가져 보겠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에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요한복음서의 저자를 잘못 알고 있다면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알 수 없는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면,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제자는 사도 요한(또는 안드레아)이 되므로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난 다음에 그런 주장을 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이며,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이런 어부가 대사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며(요한 18,15)

특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만난 일곱 제자 중에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이 포함되어 있고 또 알 수 없는 제자도 함께 있었으므로(요한 21,2) 동일 장소에 요한과 알 수 없는 제자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예수님이 사랑하는 알 수 없는 제자는 누구일까?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복음서의 기록이 진실 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인 오늘부터 함께하여 승천할 때까지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에 의해서 저자가 임의로 설정한 가공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은 사람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면 독자들이 복음서의 내용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 하나는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은 부처님 열반하신 후 500 여년이 지나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으로 부터 직접 듣고 기록하였다는 뜻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됩니다. 500 여년이 지난 후에 부처님으로 부터 직접 들어 기록하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스님들에게 물어보면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보지 못하고 그런 곁가지를 붙들고 늘어지느냐고? 그런 힐책을 듣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이런 곁가지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곁가지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곁가지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느 누구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집안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번 주를 우리 온 그리스도교가 하나가 되자는 일치주간으로 정해야 할 만큼 분열이 되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일부러 가톨릭이란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산 정상에 올라가는 수많은 등산로를 가지고 내가 올라가는 등산로만 옳다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로 모든 종교는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 인간들이 죽였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인 죄를 영원히 씻을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우리는 영원히 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인일 뿐이며 죄의 대가를 기다리는 영원한 미결수들입니다.

이를 희생양의 대속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했던 그들의 잘못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라고 공격하는 일부의 주장에 대하여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예수님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하신 분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천지불인(天地不仁)'함을 알려준 노자의 가르침도 우리는 함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모든 공관 복음서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천지불인(天地不仁)'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는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겠습니다.
님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욕망에 의해서 희생된 분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맞서 싸우다가 이제는 더 이상 희생된 분이 나오지 않도록,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님을 기억하며 당신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새기며 당신을 모십니다. 님처럼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맞서 싸우며 자비를 실천해야 아빠 하느님의 오른편에 설 수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겠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 제게 '너는 무엇을 찾기 위하여 방황했느냐'하셨습니다.
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방황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방황하는 저희를 언제나 님처럼 바른 길만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의 빛으로 어둠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