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저에게는 '나'라는 친구가 없으니 돌아가시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18 조회수489 추천수2 반대(0) 신고
어느 날 한 사람이 연인의 문을 두드리자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십니까?”하고 묻자 그는 “나요.”하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장 돌아가시오! 그렇게 성숙하지 못하고 오만한 사람을 위한 방은 없소.” 익지 않은 날고기는 떨어져 있는(이별의) 불꽃으로만 요리가 된다. 이 불꽃이 아니면 위선자의 뿌리깊은 수치심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지만 이별의 아픔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연인에게서 쫓겨난 후 연인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 간 후에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녀의 집으로 다시 갔다. 그는 내면의 평화를 갖고 제대로 답변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그의 연인이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 그가 답했다.
사랑하는 이여, 아무도 아니고 바로 당신입니다.”
이제 당신은 나입니다. 어서 들어 오세요.
접때에는 두 사람의 ‘나’가 있을 방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을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루미의 『마스나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하느님께서는 이기심에 가득 찬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가득 찬 거짓 자아’를 갖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깨어 있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없고 ‘우리’만 있다는 것은 항상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우리는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통은 죽음의 일부이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면 죽음은 부활의 첫걸음이다.
즉 고통은 부활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과거의 역사다.
지금의 너도 어쩔 수 없는 너의 과거의 역사다. 그러니 내가 너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그 판단이란 어쩔 수 없이 나만의 주관적 역사의 잣대로 너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판단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것을 안다는 사실이 빛이다. 인간은 이 사실을 안다. 지성의 빛이다.
 
들소 한 마리가 사자에게 물어 뜯겨도, 옆의 들소들은 그 큰 덩치와 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안타깝다. 합심하여 도와줄 줄을 모른다. 물소에게는 의지의 빛이 없어서다. 인간은 서로 도울 줄을 안다.
의지의 빛이 있어서다.
 
작은 개 목걸이가 개 목을 피가 날 정도로 조여서 목걸이를 풀어주려고 개를 쫓아다녀도, 개는 한사코 도망만 친다. 안타깝다. 개는 아픔에 대한 감성의 빛이 없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과 달리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빛 안에서 살아간다. 영혼의 빛 안에서 살아간다. 이 영혼의 빛을 깨닫고, 이 보이지 않는 빛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우리의 지성에 주님이 계시고, 의지에 주님이 계시고, 감성에 주님이 계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 아니 주님만이 살아계시다. 나는 없다.”
(<이 보나벤뚜라 형제의 관상 이야기> 중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포도나무는 하나이며 가지만 무성하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일부분이지 포도나무는 아니다.
하늘나라에는 ‘나’가 없다는 말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