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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와서 보아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8 조회수785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 2 주일 ; “와서 보아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나왔던 사람들을 떠올리려고 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이나 행동보다도 그 사람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는 우리 감각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시각’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눈은 영혼의 문이다.’라고 하며 모든 좋은 것, 안 좋은 것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 영혼에 영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안에도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 하여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사들을 제정하실 때도 물과 기름, 안수 등의 눈에 보이는 물질과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강림을 체험하도록 하신 것도 다 보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교수 신부님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매우 성인처럼 사십니다. 강의 때 언뜻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입고 돈도 가난한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주며 밥과 빨래, 청소도 본인이 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사제관에서 함께 살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 때 그 분의 본당에 가서 한 번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가서 눈으로 보니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씀들도 사실이고 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임에도 매우 춥게 지내셔서 우리를 사제관에 재울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추운 곳에서 사시는 것이 습관이 되셔서 괜찮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니 여관에 가서 자도록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가난이나 절제, 극기의 삶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떤 신부님도 매우 가난하게 사시지만 신자들에게까지 그 가난을 강요하여 원성을 듣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부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감추어져있는 자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자신의 감추어진 내면을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는데, 그 분은 남이 그렇게 하지 못함을 비판하지 않고 각자의 삶의 방법을 존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첫 두 명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했지만 그 말만 듣고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예수님 뒤만을 쫓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드디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합니다.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와서 보아라.”하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이제 직접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고는 그 분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그 분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정확히 시간까지 기록합니다. 이는 그 분을 만난 그 순간이 자신의 온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교구에서 주최하는 교사 피정 때였고 2005년 2월 4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코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거나 뒤돌아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성소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중도에 결심을 포기하고 옷을 벗습니다.

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눈으로 직접 보듯이 명확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경험’이 없어서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소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지켜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의 찌릿찌릿한 감정은 평균 1년 정도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여 많은 커플들이 일 년이 지나면 위기를 맞습니다.

이 감정은 삼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부부들이 말하는 “니 살이 내 살이고 내 살이 니 살”인 것처럼 서로 살이 닿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부 각자에게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남자는 이제 한 사람은 정복하였으니 다른 사람을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래 동물적으로 남자는 정복하려는 욕망과 자손을 많이 번식시키려는 욕망에 열 여자 마다 않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남성이 정말 자신이 받아들여야하는 사람인지 결혼 전날까지 고민합니다. 언제 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고 또 종교의 믿음을 통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는 그 둘이 끝까지 사랑을 지속하고 오히려 완성해 갈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합니다. 저는 이것을 ‘부부간의 서약’순간으로 봅니다. 혼인 성사 때 둘은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신 것임을 굳게 믿고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하느님과 이웃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이 한 순간의 서약이 위기가 올지라도 평생 부부를 지켜줄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이 중요한 순간을 잊어버리는 부부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두 제자도 그 결정적 순간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제 성소든, 수도 성소든, 결혼 성소든, 아니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든 간에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결정적인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 체험만 있으면 믿음에서도, 또 어떤 삶을 살아가든 흔들림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보려 해도 그 분은 더 이상 우리 앞에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당신 두 제자들에게만 그런 경험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는 허락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교회의 모습으로, 성경 말씀으로, 또 구체적으로 성체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밤을 보냈다는 뜻은 ‘기도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기도란 바로 그 분을 직접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성체를 통해 밤새 기도하지 않고서는 ‘눈에 보이는 확신’을 얻을 수 없고 그렇게 자주 혼란스러워 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본 것보다 더 확신을 얻고 그 확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사실 우리도 예수님을 계시하는 사람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시오.’하며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삶의 확신과 그로인한 삶의 의미와 힘을 주시기 위해 ‘와서 보아라.’하시며 우리를 당신과의 만남에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도 우리 삶을 바꾸고 완성할 힘을 얻기 위해 꾸준한 그 분과 머무는 시간을 갖아야 하지 않을까요?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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