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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제파악을 하는 僊 [김웅열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1 조회수622 추천수4 반대(0) 신고

                    

                     매괴 성모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주제파악을 하는 德

 매산 위의 달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에는 누가 스타였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아마 저분이 메시아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가 권력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높이 올라가면 내려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저분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나서 예수님께 갈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저 양반이 메시아다!’ 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에게는 특별한 덕이 있었습니다.

그 덕은 ‘주제파악을 하는 德’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세례자 요한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화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 영화가 성공하고 어느 영화가 실패합니까? ”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연은 주연 노릇을 제대로 해야 되고

조연은 조연노릇을 제대로 해야 성공을 하고 돈을 법니다.”

그러나 조연이 워낙 개성이 강해서 주인공을 따라붙기 시작하면 그 영화는 망한대요.

조연은 조미료 역할을 해야 되는데 조연이 주 메뉴 역할을 하면 그 영화는 실패한대요.

감독의 입장에서 주연급 배우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주연을 받쳐줄 조연을 누구를

선택해서 이 영화를 감칠 맛나게 할 것이냐...그러면서도 주연보다는 카리스마가 적어야 되고, 

오버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정확히 지킬 줄 아는...그런 조연은 주연보다 더 프로여야 한다.

주연보다 조연을 선택하는 것이 더 어렵다...그런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이 맡겨주신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에 입만 딱 다물고 있었다면, 아니면 나타난 예수님을 깔아뭉개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제자들도 당연히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알았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조연이라는 역할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을 자신에게 모으기보다

예수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는 역할, 그것이 바로 본인 자신에게 하느님이 맡겨준

충실한 사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사제의 강론을 들으러 교우들이 모여듭니다.

일단 거기까지는 하느님이 사제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지만,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사제는 사라져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예수님 행세를 한다면 그야말로 교주요, 우상숭배입니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고 나는 작아져야 하는데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하느님은 갈수록 작아지시고 자신은 점점 커집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작아짐을 깨닫고 시작했건만

칭찬을 받다보면, 주변에서 너 잘 났다, 훌륭하다.... 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예수님은 점점 작아지시고 그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꼴불견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제파악 할 때는 질투심이 없어지고 겸손해지지만

주제파악을 못하고 산다면 방향을 잃은 곰처럼,

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사고를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한 번 최고의 자리를 향유했던 사람이 차석으로 내려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들었던 칭찬이나 대접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 그 이외의 어떤 것도 더 바라지 않았습니다.

“저분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는 갔지만 가까이 접근을 못합니다.

소심함 때문인지,,,.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먼저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과 저 앞에 있는 저 분 사이에서누구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서 갈팡질팡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서십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찾아 나설 때, 우리들은 하느님을 절대 못 찾습니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분심잡념부터 듭니다.

‘감실 앞에서 예수님 만나야지...’

여러분, 예수님 가까이 가본 적 몇 번이나 되십니까?

기도만 하면 분심이 들어와서 저 앞에 보이는 예수님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식새끼가

들어서고, 돈이 들어서고, 세상재미가 그 앞을 가로막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그 전 스승을 포기하고 스승이 알려주는 대로

예수님을 향해서 방향을 잡긴 잡았지만 근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받은 우리들의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서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오히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가서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어갈 때 그분은 뛰어서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뛰어서 예수님께 가면 그분은 날아서 오십니다.

우리가 다른 길로 외도를 할 때 그 길 앞에 막아서셔서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제자 앞에 나타나셔서 먼저 말을 걸면서 예수님께서 건네신 첫마디가 뭐였습니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여러분들, 대답하십시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지금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시고, 예수님께서 물으셨다고 생각하시고

이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됩니다.

사제도 사제의 입장에서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신앙을 선택했고 예수님을 선택했던가!


어떤 사람은 안전을 구하고 있습니다.

안정된 자유를 좋아하고, 안정되게 살기 위해서 돈을 좋아하고, 업적을 쌓기 좋아하고 ...

물론 이것이 나쁜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을 지켜주는 참된 목표는 아닐 겁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요한의 제자들을 뭐라고 답하지요?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닐 겁니다.‘


주님은 단 두 마디를 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Come, and you will see.”

오는 것은 내 몸이 나가야 되는 것이고, 보는 것은 영적인 것을 뜻할 겁니다.


첫 번째, 가야합니다.

“피정에 누가 초대하면 피정에 가라.”

“세미나에 참석해 봐라.”

“적극적으로 찾아서 순례해야 된다...가 봐라!”


오라는 것은 초청입니다.

미사 때마다, 피정 때마다, 세미나 때마다 내가 선택해서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초청받아서 온 겁니다.


둘째, 보라고 그랬습니다.

니가 가지고 있는 눈과 귀와 입을 총동원해서 찾아라!


같은 날 똑같은 차를 타고 순례를 왔다 가더라도 한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 하고

한 사람은 무덤덤합니다.

똑같은 미사에 참석해서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어떤 이들은 치유를 받고 나가는데

어떤 이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똑같은 성서를 읽어도 내 눈이 영적인 눈으로 성서를 읽느냐.!

거기에 따라서 보기는 보더라도 그 차이는 큽니다.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을 너희들이 와서 찾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장소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의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입만 열면 바로 내 옆에 계시고, 공기 중에 계시고, 말씀 가운데도

계시고, 세상 피조물 가운데도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와서 봐야 된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체험한 시간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몇 시라고 그랬습니까?

네 시쯤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와 알지 못했던 알게 된 때의 경계선이 네 시쯤이었다.’

감격의 시간이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적은 겁니다.

예수님을 체험했던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시간이 없었습니까?

무덤덤하게 종교인으로 살다가 그야말로 번개에 맞은 듯 하느님을 체험한 적이 없습니까?

눈물이 쏟아지고 회개가 되었던 적이 없습니까?

차에서 무심히 들었던 강론 테입 하나에 인생이 바뀌고 하느님을 체험한 적이 없습니까?

우연히 평화방송을 듣다가 강사의 그 강의에 이제껏 살았던 모든 인생관이 정리될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 감격의 시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철학가요, 수학가요, 파스칼은 하느님을 만났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자기 옷의 윗단 안쪽 주머니 양피지에다가 뭘 써가지고 다녔느냐?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나 파스칼의

하느님을 나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만났다.’

파스칼은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양복 안단에 있는 매달고 다녔던

그 양피지를 찾아보았습니다.

‘네 시쯤 이었다.’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 여러분 인생에 몇 시쯤이었습니까?


세례 받고 기쁨의 시간은 잠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갓난아기들은 세상에 태어나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알아갑니다.

누구나 다 세례 받고 나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모님을 체험하는 때가 있을 겁니다.

오늘 미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와서 보라!


주님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저 세례 받은 지 30년이 넘어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덤덤합니다. 옆집에 사는

아무개는 세례 받은 지 일 년도 안 되지만 나보다 더 뜨겁게 삽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 어디 계신 겁니까? 제 앞에 나타나십시오.

백 날 그런 이야기 해봐야 되지 않습니다.


성서 책을 펴십시오, 읽어내려 가십시오.

테입을 듣고 기도하십시오.

어디 피정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십시오.

방구석에 처박혀 앉아가지고 절대 예수님 못 만납니다.

내 안에 어둠이 잔뜩 있는데 그 시커먼 어둠을 가지고 어두운 가족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체험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빛이 강한 쪽으로 찾아가라고 권고하는 겁니다.


감곡신자들은 늘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곳이 얼마나 빛이 강한 곳인지 모릅니다.

틈날 때마다 와서 무릎 꿇고 성체조배 하십시오.


순례자들도 틈날 때마다 성모님 집에 오셔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오늘 나는 감곡성모순례지에서 만났다!’

하는 감사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오늘 이 미사 중에 전구를 청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9. 01. 18(연중 제 2주일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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