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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 바오로 개종 축일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5 조회수565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도 바오로 개종 축일> - 윤경재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5-18)

 

 사도 바오로의 회두 사건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저 한 사람의 회두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걸음마를 떼던 교회가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오로는 배움을 좋아했으며 무척 종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학자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라고 말할 정도로 합리적인 종교관을 지녔습니다. 바오로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헬레니즘 지역인 타르수스에서 낳고 자라서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습니다.

  그리스도 교인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을 타고 가던 그는 하늘에서 비추는 밝은 빛에 땅으로 떨어집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사도 26,14)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눈을 뜨게 되자 주님의 뜻대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바오로 같은 강렬한 체험을 한다면 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터인 데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과 달리 바오로 친서인 갈라티아 1,15-16절에서 기술한 바오로의 회두 내용은 그런 경험이 내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는 계시라고만 말했을 뿐 강렬한 체험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시 사건 후에 사막인 아라비아로 가서 삼 년을 머물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케파를 만나 보름 동안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삼 년간 관상하며 주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체험은 전형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이후 여타 종교체험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 특징은 개인적인 체험이라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며, 감성뿐만 아니라 이성의 작용까지 동반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일깨웠으며, 순전히 피동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또 그 사건 체험이 남은 생애를 결정했습니다. 이 회두사건 전후에 변화한 모습을 사도행전은 상징적으로 ‘사울’에서 ‘바오로’로 인격 자체가 바뀌었다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의 사람됨을 그대로 이용하시는 주님의 뜻을 통찰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쓰셨습니다. 여러 사람과 협조하는 능력, 사물과 인물을 꿰뚫는 통찰력, 폭넓은 지식, 타인을 염려하는 이해력, 경제적 도움을 바라지 않는 자존심, 지나치게 빨라 두서없어 보이는 머리 회전, 강한 표현을 요령껏 말하지 못하는 눌변, 발작병을 앓아 생긴 열등감 등등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장단점을 모두 주님께 바쳤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바오로 덕분에 생겼다고도 말하고 지금의 교회는 바오로의 교회라고까지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불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동안 범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조금도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비움과 낮춤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마저 비우시고 낮추셨는데 하물며 주님을 박해하던 죄인인 자신이 어찌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논어 헌문 5장에 ‘有德者 必有言’ 이라고 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씀이 있다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德은 깨달음을 뜻합니다. 말씀은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 합당한 본보기가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의 서간에 나타난 언행은 오직 주님께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간이 신약성경 정경에 들어갔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에 합당한 태도를 지키는 데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 회두 축일을 맞아 우리도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조그만 체험을 놓치지 말고 지속적 기도와 관상을 통해 내적 일치를 키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처음에 미약했던 소명체험이 점차로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참고; 德을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경우 - 노자 道德經은 도덕을 이야기 하는 책이란 뜻이 아니라 道를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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