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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5 조회수697 추천수9 반대(0) 신고

 

 

 

연중 제3 주일 -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설악산 울산바위 밑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침에 보는 울산바위의 전경은 빠져들듯 아름답고 장엄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또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산이 바위로 되어있어서 보기엔 장엄하지만 그만큼 풍화에 끄떡없어 마치 그 산이 사람이라면 참 고집스런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첫 번째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네 명 모두 어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니 그들은 가족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번째 제자들의 가장 큰 특징인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극단적으로 순명할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미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줄 아는 순박한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은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히십니다.

 

만약 그들이 평생 고기만 잡고 살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날 주님께 나아가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 모든 물고기들이 다 하느님 것인데 그것들이 하느님께 가치가 있을까요? 신발공장 사장에게 신발을 선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갖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마치 내가 아무리 어떤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그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엔 영원히 짝사랑의 슬픔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사람만은 당신 것으로 하실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은 바로 ‘사람’입니다. 물론 그 사람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만약 어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주어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자녀들 때문에라도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낚는 어부!’란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에 온전히 훈련받지 못한 어부는 또 그만큼 많은 물고기를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물코가 하나만 끊어져있어도 그걸 통해서 많은 물고기가 빠져나감으로 영혼을 낚는 어부들은 조금도 불완전이 없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울산바위와 같이 너무도 강한 돌덩이 같은 자아를 지니고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훌륭한 어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옹기장이와 같습니다. 옹기장이가 고운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어야하는데 그 흙이 자갈들이라 깨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질그릇은커녕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 중에도 이런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자신들을 부수어 고운 흙이 되어가는 반면 유다는 예수님의 망치질에 오히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제들은 ‘중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인간을 중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을 다시 아버지께 바칩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는 순교를 당합니다. 요한도 끓는 기름 속에 던져졌다고 전해지는데 기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순교를 하지 못한 것이지 사실 순교하기를 제일 소원하던 제자였습니다.

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목자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번 용산 재개발 강제 철거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을 보며 과연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비우는 것을 ‘겸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남을 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6-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비우고 순종키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먼저 대사제로서 당신이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죽기보다는 도망치는 편을 택합니다. 아직도 사랑을 위해 온전히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하, 요한 21장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크게 배반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며 호수로 나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잡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새 그물을 치지만 고기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실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다른 제자들과 영혼을 구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삼 년 전에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사람을 낚을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스셔서 “무얼 좀 잡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모르고 그저 “아무 것도 못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온 이들에겐 사실 모욕과 같은 말입니다. 배를 타보지도 않았을 법한 사람이 호숫가에서 약 올리며 농담으로 하는 소리처럼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어린이의 말에까지 순명할 정도로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지 모르는 한 사람의 말에 순종합니다. 자신들을 온전히 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오른 쪽에 그물을 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이 “저분은 주님이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온전히 순종할 정도로, 아니 어린아이에게까지도 순종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할 줄 알아야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자아, 자존심, 자애심 등,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라는 뜻이고, ‘매일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한 매일 매일의 꾸준한 ‘노력’입니다. 영성에서 꾸준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자기포기’와 ‘꾸준한 노력’ 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절대적 요소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랑’과 ‘꾸준함’만 지니십시오. 주님께 많은 영혼을 바쳐드릴 수 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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