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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9 조회수637 추천수6 반대(0) 신고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18-22)

 -유 광수신부-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왜 사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왜 사는가? 라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런 질문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이다. 즉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진실히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이며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 상대이기 때문에 떨어질 래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시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나던 일을 말하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 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 사람도 없었으며 소금으로 문질러 줄 사람도 없었고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 너를 애처롭게 보아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떨어지던 날, 너는 들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이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 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 몸을 감싸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 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에제 16,4-10)

 

하느님은 인간의 한쪽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의 한쪽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늘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이고 행복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하느님한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한테 사랑받을 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귀함이며 동물과 다른 점이다. 즉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한테 사랑받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을 신랑으로 삼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이고 인간의  품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하고 그것이 곧 행복이고 생명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신랑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 30, 19-20)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하느님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면 인간이 되고 돈을 사랑하면 되고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이 되고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의 노예가 된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닮아 가고 하느님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이루워 질 수 없었던 모습이 이루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과 하느님이 함께 하는 성찬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이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제는 헌옷을 입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새 옷을 입어야할 때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할 때이다.

 

새 천조각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구멍을 채우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충만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 천조각은 비록  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천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충만함이다.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생명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코후6, 17)

 

복음을 듣는 자세가 있다. 즉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새 천 조각이란 복음이고 헌 옷이란 자기의 고정관념, 생각, 자기의 삶의 틀, 선입관 등이다. 복음을 들었으면 자기의 고정 관념에 얽매여 있지 말고 복음의 생각으로 바뀌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복음 묵상할 때보면 복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활에 맞게 말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복음 묵상이 아니라 일종의 생활 나눔일 뿐이다. 복음 묵상을 했으면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한다. 복음 묵상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고 복음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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