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바보상자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1 조회수433 추천수4 반대(0) 신고
 
 

바보상자 - 윤경재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1-28) 

 

  요사이 TV를 켜면 오락 연예 프로그램에 웬 진행자가 그리도 많은지 손꼽아 세어보게 됩니다. 세 명은 오히려 적은 편이더군요. 여섯 일곱 명까지 되는 경우도 보입니다. 손님은 한두 명인데 진행자가 더 많은 셈입니다. 그런데 진행자들을 눈여겨보면 모자라거나 악역을 맡은 사람이 꼭 끼어있었습니다. 일명 독설가라는 역할을 합니다. PD들은 요즘 세태가 이런 것을 좋아해 이렇게 만든다고 합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것을 좋아라한답니다. 의도적(?)으로 악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듯한 방법을 아예‘노이즈 마케팅(소란 상술)’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고서도 막상 시청률을 보면 10% 대에 머문다고 합니다.

  이런 프로는 손님이나 진행자가 말실수를 하고 그것을 어떻게 모면 하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숨은 듯합니다. 마치 순발력 경연장을 지켜보는 느낌입니다. 또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매번 나올 때마다 우스운 경험담이나 재미있는 삽화를 한두 개쯤 말하지 못하면 초대 받기 어렵다고도 합니다. 잘 포장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나면 내가 무엇을 보았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하나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나 봅니다.

  유대 회당에서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옛 이야기나 율법을 들어가며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늘 과거와 미래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 하였기에 누가 말해도 비슷한 수준에 머물었습니다. 또 언제나 남의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중은 회당 안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지만 막상 회당 밖으로 나서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겁니다.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TV 같은 바보상자 역할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며 현재의 모습을 강조하셨습니다. 또 말로만이 아니라 實例를 보여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으로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언행일치의 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모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권위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감동과 흥미가 넘쳐흘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씩 조금 유별난 성격을 드러내는 정도일 뿐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부대끼며 지냈습니다. 아마 자신도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스스로 괴팍한 성격을 지녔다고 인정할 뿐이었습니다. 철저히 숨기고 사는 더러운 영의 속성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짐짓 의로운 체 하고 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수한 성령을 보자 그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꼴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자마자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본디 ‘사탄’이라는 히브리어는 ‘고발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악마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더러운 악령은 고발자답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최후발악을 하여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권능만 높일 뿐이었습니다.

  악령은 언제나 떼거리로 모여 다닙니다.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깡패들이 떼거리로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듯 말입니다. 길 가다가 불량한 사람을 만나 두려운 것은 일당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떼거리로 몰려와 해코지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능력 있고 힘센 사람은 아무리 떼거리로 몰려와도 겁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약점을 낱낱이 알기 때문입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는 그들의 속성은 늘 같습니다.

  시편 1편에서 의인과 악인들의 비교를 아주 적나라하게 그렸습니다. 의인은 단수로 표현했고 악인들은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의인은“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1,2)이라 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1,4)라고 합니다. 시 1편에서는 처음에 의인을 단수로 표시하다가 심판 때에 가서야 복수 형태를 썼습니다. 현세에서 비록 악인들에 둘러싸여 외롭게 사는 듯하지만 꿋꿋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유혹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커다란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회당은 본래 거룩한 장소이어야 마땅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더러운 영들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떼거리로 몰려와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었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들을 몸 안에 담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도 정체를 숨기고 기회를 엿보는 악령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일당백의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을 거룩한 성전인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회당처럼 더러운 영들이 기생해 살지나 않은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