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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20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5 조회수489 추천수6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 신앙과 결단

 

 제 3 장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

 

3. 신앙은 은총이다

 

 “‘로마 예식서’에서 세례 예식 집전 사제가 예비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하고 물으면 예비자는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응답한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고 물으면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하고 응답한다.” (CCC 168)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신앙을 왜 교회에 청하는 걸까요? 그것은 신앙은 혼자 힘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대상이 없다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또 믿을 대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인다면 이미 믿음은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둘째는 ‘이성’이 있어야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믿을 것인지, 또 왜 믿어야하는지를 이성의 작용을 통해 받아들이고 결국 판단까지 이성을 통하여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맹목적으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야단치십니다. 믿음은 눈으로 시작되지만 이성의 머리를 거쳐 마음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은총이 있어야합니다. 성령님을 담는 그릇이 바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의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마태 16,17)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도우심이 필요하며, 성령의 내적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께 돌이키시고 정신의 눈을 뜨게 하시며 [진리에 동의하고 이를 믿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주신다.’ (DV: 계시헌장, Dei Verbum 의 약자: 5)” (CCC 153)

마지막으로 넷째는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입니다. 신앙은 강요받지 않는 자기 자신의 결심입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더 자세하게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는 지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거센 바람을 보자 겁을 집어먹고 의심을 하게 되고 물에 빠져들게 됩니다.

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바람을 보았을까요? 그리스도만이 그를 물 위로 걷게 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작게나마 남아있는 그의 자아는 ‘주위’를 살피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아닌 ‘뱀’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자아’가 곧 ‘교만’이고 ‘사탄’이고 ‘죄’입니다. 나의 믿음을 갉아먹는 것이 곧 나의 자아이고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의 교만을 꺾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죽기까지 하실 작업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가운데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배를 운전하게 내버려둡니다. 그들은 짐짓 목수인 예수님이 그들의 뱃놀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셔서 ‘잠’을 주무십니다. 이 ‘잠’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 ‘잠’은 겸손해진 누군가가 ‘깨우지 않으면 결코 깨지 않는 잠’입니다. 이 ‘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느끼는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부재’는 바로 우리의 무관심과 교만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거나 그 분은 우리가 깨우면 바로 일어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탕자 아들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습니다.

풍랑이 심해지고 배가 침몰할 지경에 다다라서야 베드로는 필요 없다고 느꼈던 그리스도께 살려 달라 청합니다. 예수님은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5)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시기 위해 사람이 겸손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약한 이들아!” (마태 8,26)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움은 하느님과 함께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1요한 4,18) 사랑의 두 날개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깁니다. 자아를 모두 버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얻을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또 간단하게나마 죄의 뿌리, 즉 ‘삼구 (三仇)’, 세 가지 원수와 그를 극복하는 ‘복음삼덕’을 상기합시다.

죄는 ‘교만’으로 시작하여 ‘성욕’, 그리고 ‘소유욕’으로 갑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교만’으로 유혹하였듯이, 교만을 ‘사탄’이라고도 하고 인간의 세포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죄의 뿌리입니다.

이 교만과 나머지 두 죄의 뿌리는 인간의 성욕을 통해 후세에 전달됩니다. 교만의 죄를 짓고 들어온 것이 육체의 욕망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식을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첫 계명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육체적 욕망’과 ‘사랑’을 혼동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사랑이 ‘십자가의 희생’이지 육체적 욕망이 아님을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은 이 육체적 욕망을 통해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은 그 육체적 관계에 의해 다시 부모의 죄를 물려받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따라 살면 죽음이 온다고 바오로 사도는 입이 닳도록 자신의 편지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사회가 형성되는데 즉 카인이 동생 아벨이 부자가 되는 것을 질투하여 살인을 저질렀듯이, 나오게 되는 것이 돈에 대한 소유욕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지만 이젠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하고 더 이상 나누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예화를 통해 ‘재화를 이용해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라고 하시며 물질을 쌓아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집착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죄의 뿌리를 이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복음삼덕’입니다.

즉, 마귀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4,9-11)라고 ‘교만’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만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임을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가르치십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루카 4,12)

즉, 교만은 믿음을 죽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다시 살리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바로 ‘순종 (oboedire)’를 낳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당신들의 무한한 겸손한 순종으로 아담과 하와의 교만으로 잃었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또 사탄은 이미 40일 간을 단식한 예수님을 빵으로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구의 두 번째, ‘육체’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사람은 육적인 빵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빵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고 우리가 매일 청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육에 씨를 뿌리면 죽음이 오고 영에 씨를 뿌리면 생명이 옵니다. 육의 반대가 영이라면, 성욕의 반대는 정결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식욕과 성욕은 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채우는 사람은 성욕도 높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육체적은 욕구를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은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도 40일간이나 단식하는 노력을 하셨다면 우리야 어때야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악마는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이 당신 것이 될 것이오.” (cfr. 루카 4,6-7) 라고 유혹합니다. 이 세상이 이미 사탄의 손아귀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셨던,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 것은 모두 사라져갈 것이고 우리 육체도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추운 때에 가난하게 태어나셔 나무에 뉘어지셨고 또 가난하게 다 벗겨지시고 나무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가난’입니다. 가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섬기는 것” (cfr. 루카 4,8)입니다.

이렇게, 사탄(교만), 육체(성욕), 또 세상(돈)은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 하여 성령의 은총을 막아 믿음을 떨어뜨리고 그렇게 성령의 열매를 빼앗아갑니다.

그 반대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순종(겸손), 정결, 가난의 복음 삼덕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누구 하나가 완전히 이길 때까지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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