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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9 조회수492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뒤 두 구절은 상호 연관성이 있는 구절인지, 아니면 독립된 구절인지를 지금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처음 오늘 말씀을 접했을 때에는 전혀 별개의 말씀으로 이해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된 말씀이 아닌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단식논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식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단식하지 않는 것이 좋으냐? 하는 이런 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단식을 해야 할 사정이 되면 단식을 하는 것이고 단식이 필요치 않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명약도 잘못 쓰면 모두 독약이 되는 것처럼 절대화 시키지 말고 모든 것을 유연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비만한 사람은 살을 빼기 위해서는 섭취하는 음식량을 조절해야 하므로 단식도 필요합니다. 이를 절대화하여 영양결핍증에 걸린 허약한 사람에게 단식을 권고하는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의 상태에 따라 약의 처방이 달라지듯이 사람을 가르치고 교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획일적인 기준을 정하여 모든 감기환자에게 동일한 처방을 하고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 초등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똑같이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은 왜 감기환자에게 왜 똑같은 처방을 하지 않느냐? 하는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확대하여 생각하면 지금 우리들의 사고가 질문한 그 사람의 생각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하신 말씀은 죽음을 이미 예견하신 말씀이지만 상황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상황이 변하면 우리도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헌 포도주는 율법이며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생각해 봅니다. 또 이를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비유하면 영세를 받기 이전은 헌 포도주이며 영세 후의 삶은 새 포도주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기존의 나쁜 가치관과 생활태도는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만을 생각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 라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또, 당시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문자 해석에 급급하여 형식 논리에 치중하였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율법이 지향하는 율법의 의미를 생각하여 새롭게 해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방황했던 그런 상태에서의 율법과 내 땅을 차지하여 민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지금은 율법의 해석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더 나아가 생각하면 저희는 포도주이며 교회는 포도주를 담는 부대입니다. 신세대의 신자가 계속하여 입교하고 있으나 이를 담는 부대는 변하지 않고 새 포도주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도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교회로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하신 말씀은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는 언제나 새롭게 변화를 해야 하고 사회가 새롭게 변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장강(長江)의 뒤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밀어낸다는 중국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자연의 이치를 거역한다면 세상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것인지 아니면 논쟁을 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복음서의 소제목은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으로 논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하셨지만 대신에 논쟁은 환영하며 논리적인 설득으로 상대편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합리적인 논쟁은 오히려 사라저 가고 있습니다. 년말 우리 국회의 모습은 이런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에 그 가혹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던 것이며 이런 정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정서 속에 지금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이런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진실된 것은 잘못된 것을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이를 논리적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힘으로 극복하려는 것은 진리의 삶을 추구하는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통하여 새 포도주가 생산되는 것이며 이런 논쟁은 그 생명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역동성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번 주를 일치주간으로 정한 의미도 주님을 섬기고 자비를 실천하는 같은 그리스도교면 나머지 것은 모두 극복하고 일치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유연한 사고를 알려주신 오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임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유연한 사고와 때가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땅은 강물의 흐름이 막혀 있고 오히려 역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순환의 이치에 순종하는 참된 자녀가 되도록
저희 모두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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