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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의로운 일이기 때문에 한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1 조회수535 추천수2 반대(0) 신고
구태여 남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또 스스로 좋은 일이라고 느끼지 않고
그냥 의롭다는 생각만 하고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칼라너(Karl Rahner)는 이와 같이 물으면서
“만약 이와같이 했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한 채 하느님을 경험한 것이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기본적인 교리이며 구원의 기준이라고 복음서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 25:40, 45)
이 가르침에 대한 배경이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심판 때 어떤 시험이 있게 됩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의외였다.
그들이 기대했던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믿음이 있는가,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가,
규범을 지키고 있는가, 올바른 윤리관을 갖고 있는가 하는 등이었지만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갈라 놓으실 것이라고 분명히 천명하신 것이다.
그 기준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양편으로 갈라진 의인들과 악인들은 모두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은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바로 나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반면에 왼쪽에 있던 악인들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이 당신인 줄만 알았더라면 왜 드리지 않았겠습니까?”하고 변명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살펴주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 복음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이미 많은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신앙의 깊이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그네들과 같은 약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찍이 유대의 예언자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신앙을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떠셔서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이 복음에는 다른 뜻도 숨겨져 있다.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돌본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돌보지 않은 사람 모두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돌본 무리들은 의로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였지만
가난한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
반면에 돌보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돌보지 않았다.
양쪽 다 가난한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복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옳은 제자는 하느님께서 어떤 상황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를
계산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가치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돌본다.
옳은 제자는 미리 따져보지 않고 돌보아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돌보아 준다.
 
이 복음의 마지막 가르침은 엘리어트(T.S. Eliot)가 말한 대로
불순한 동기로는 의로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다.
의로운 일을 하는 이유는 따질 필요가 없다.
 
많이 배워 소위 엘리트라는 사람이
가방 끈이 짧은 사람보다도 판단력이 떨어지고 현명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일을 하는 이유는 따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의지”,
바로 선의지(善意持, good will)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진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상 남을 위한 삶이었으며 항상 더불어 사시는 삶이었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를 내어놓는 삶을 사셨고, 또한 그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사셨다.
당신의 삶은 참으로 외로운 삶이었으나,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서로 사귀고 즐기고 기뻐하면서 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능력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죄인들이 그 죄로 인하여 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도록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선의지(善意志)가 그분의 삶의 모두였고,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선의지를 호흡하면서
당신을 선의지로 가득 채우게 됨으로써 전능하신 힘과 용기를 가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선의지란 참 사랑에서 비롯된 참고 기다리고,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고,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하느님 아버지가 속성상 원래 선하시이기 때문에,
신인(神人) 양성(兩性)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부단히 하느님 아버지의 선의지와 접촉하시면서 호흡을 맞추셨던 것이다.
기도로, 명상으로, 사건을 대면할 때, 사람을 대할 때,
하느님 아버지의 선의지를 먼저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선의지를 본받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다고 선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마뉴일 칸트는 선의지(善意志)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선하다고 칭찬하는 것은 무조건 다 선하다고 할 수 없다.” 했다.
사람들이 선하다고 부르는 예컨데, 지성, 기지, 판단력, 정신의 재능이라고 부르는 용기,
과단성, 또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중에 권력, 명예, 건강, 만족 같은 덕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심성(心性)이나 행위원리(行爲原理)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것들을 바로 잡아주는 선의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득의양양(得意揚揚)해서 이로 인하여 교만에 빠지게 되므로
“선의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게 될 때, 의지(意志)가 선할 때만 도덕적으로 선할 수 있다고 했다.
“시장이나 백화점의 상인(商人)이 손님을 맞을 때는
공손히 인사하며 맞는 것이 상도(商道)이다.”
손님이 상점에 물건을 사러 왔을 때, 물건을 사든지 안사든지 순수한 심정으로 맞이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갖은 예의, 공손, 서비스 다해서 노력하는 것은 매상을 올리려고,
물건을 팔아서 돈 벌기 위한 흑심이 저변에 깔린 채로 행해진다면 그 공손, 예의, 서비스는
선의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선의지의 동기에 돈벌기 위한 불순한 조건과 동기가 깔려 있다면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선의지를 동시에 의무의식(義務意識)이라고도 했다.
만약에 그 상인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고객에게 정직한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사람이 의지나 의무의식을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 받을 수 있는
순수성을 갖고 있지 않고 의지도 확고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선의지도 그러하지만, 예수님의 선의지는
무조건적 순전히 인간애와 사랑을 베풀자는 동기에서 나왔고,
이것은 하느님의 선의에 부단히 따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칸트의 말처럼 인간의 의지로 언제까지나, 어떤 상황에도
선의지를 베풀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그 믿음에서 발동된 선의지는 도덕적인 것이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과 호흡하는 그 믿음이 아니고는 선의지를 행할 수가 없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너희도 선하라”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지상명령이라고 하겠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선의지라야
진실로 인간을 감동케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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