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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기예수님/영적성장을위한감성수련문종원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7 조회수643 추천수3 반대(0) 신고




 
* 아기 예수님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마암은 것이다(마태 1,20).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시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오늘 날에도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은 오늘도 우리에게 놀라움과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겸손되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화려하게 거창하게 오시지 않고 말구유에 가장 비천하게 말입니다.

가장 볼품없이 그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감동적입니다.

모든 어두움을 비추는 가장 화려한 빛입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사고를 뛰어 넘는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 시기에 구유 둘레에 모여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비천하게 오심으로 해서 우리의 처지는

더 이상 비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그분이 가장 가난하게 오심으로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고

그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지혜를 주십니다.

아기 예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한 사실 이 자체는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모두에게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부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구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라는

하느님의 천사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일입니다.

약혼자 요셉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파혼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셉”라는 천사의 말씀에 의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의 경우와 같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누구” 바로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려워도 도망가지 말고 그것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두려워도 맡은 소명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헤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살으셨던 데로 살아갑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우리의 자유를 구속해왔던

근심, 걱정의 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기쁨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원천을 지위, 권력, 쾌락,

그리고 재산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우리의 신앙을 비웃으며 우리를 고지식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 17,14-16 참조).

하느님의 날개 그늘에 우리 몸을 숨길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시편 36,8)

우리는 걱정 없이, 열렬한 헌신으로 이 모든 의무로 주어진 일들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미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줍니다.

이러한 해방의 체험은 스트레스로 가득한 생활에 전환점이 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장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들어서는 열쇠가 됩니다.

님을 우리 가운데 모실수록 우리는 점점 평안을 얻게 되고

긴장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해왔지만

이제 이런 세상적 가치를 상대화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속삭이는, 작지만 신비스러운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지식을 위주로 한 방식들은 이미 우리가 열매 맺는 것들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는 예수님의 방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은 예수님의 삶의 깊은 신비에서 드러나는 것들을

간과하고 외적인 필요와 결핍을 채우려고 하며

그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하며 살아 있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데 마음을 쏟아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삶은 살고 팔고 그리고 소유하고 행하는

끝없는 순환의 구조 속에서 기계적인,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와 현존체험을 통한 내면의 보물을 쌓지 않는다면 종교는

기껏해야 위선적으로 헌금을 내는 행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속적인 일로 꽉 찬 세상은 우리를 언제나 활동주의와 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좇도록 몰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도, 계속 바쁘게 생활하라는 압력에 넘어갑니다.

우리는 걱정을 덜어 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또는 우리가 쫓아가는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들에 희생양이 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작은 모습으로 미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획득하여라.

더 많은 상품들을 사거라. 더 큰집을 지어라.

더 비싼 차를 구입하여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거짓 약속들은

평화와 기쁨이라는 최고의 선물들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난잡한 소비주의는 역효과적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까닭에

행복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행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가장 가난하셨지만 가장 부유하셨던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한 삶이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그 기쁜 소식을 우리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깊은 관심과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대대로 전해야 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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