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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은 대화의 상대방이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7 조회수497 추천수4 반대(0) 신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은 대화의 상대방이다> - 윤경재

 

 이스라엘의 야훼는 대화의 상대방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느님과 함께 대화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손수 계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체험인 출애굽 사건도 그 계약의 실천이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은 계약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자신들의 특별한 주님이신 야훼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언제나 주님이신 야훼를 부르짖음의 상대로 여기고 야훼께서 자신들의 신음을 들어주신다고 확신하면서 주님께 봉헌의 제사를 바쳤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그의 로마서간에서 “나는 ‘그분의 소문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 주고 그분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 주리라.’ 고 한 성서 말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로마 15,21) 라고 적고 있다.

  20세기 유대교 랍비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3인칭으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그러나 그를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 직접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신을 믿겠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그분께 말씀드리고 존재의 의문을 캐어묻겠다는 뜻이다.

  19세기 덴마크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대일의 상대방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하느님과 대면하기를 원했던 욥은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린 하느님을 원망하면서도 절대로 하느님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들의 잘못된 충고에도 하느님의 응답을 들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굳게 믿었다. 폭풍우(38장) 속에서 들려주는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에도 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풀지 않았었다. 야훼 하느님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외치던 그가, 자신의 무죄함을 대변해 달라고 외치던 그가 정작 야훼 하느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자기 고통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하느님께서 던지는 질문 속에서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네가 하느님 같은 팔을 지녔으며 그와 같은 소리로 천둥 칠 수 있느냐?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

너의 그 격렬한 분노를 쏟아 부어라. 교만한 자는 누구든 살펴 그를 낮추어 보아라.

교만한 자는 누구든 살펴 그를 꺾고 악인들은 그 자리에서 짓밟아 보아라.

그들을 모두 흙 속에 숨기고 숨긴 곳에서 그들의 얼굴을 염포로 묶어 보아라.

그러면 나도 너를 인정하리니 너의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욥 40,7-14)

 

 그리고 심해에 사는 ‘브헤못과 레비아탄’이란 동물을 예로 드신다. 그러한 동물들은 인간이 보기엔 아무 소용도 없으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공포와 해를 가져다주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의미를 누가 판정할 것이며 그 존재 가치를 그 누가 따질 것인가? 인간 세상에 드러나는 선과 악을 감히 그 누가 무게 달 수 있을 것인가? 네가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네가 심판을 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상벌을 내릴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알아주고 심지어 너를 하느님이라고 인정해 주겠노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네가 하느님 역할을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물음에 욥의 혜안이 열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와는 달리 욥의 믿음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자각 하는데 있었다. 뱀의 유혹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어 선악을 판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첫 조상과 달리 욥은 사탄의 사악한 시험에 넘어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직접 하느님과 대화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하느님을 대화의 상대방이라는 믿은 결과이었다. ‘어떻게’ 해보려는 성급함이 아니라 ‘왜’냐고 캐묻는 끈기를 놓치지 않았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 42,1-6)

 욥기 42장 마지막 답변에서 욥은 그동안 자기가 지녔던 모든 의문이 일시에 풀리면서 하느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욥의 이 대답은 자기가 전에는 하느님이 이러저러한 분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그냥 객관적으로 ‘그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그 하느님을 ‘나의 당신’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저는 알았습니다.”라는 구절에 사용된 yada 동사는 몸 전체로 체험하여 안다는 뜻이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서로 안다는 동사로도 쓰인다.

 욥에게 고통이 이제부터는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못한다. 티끌과 잿더미에 그대로 앉아 있더라도 그것은 더는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뉘우침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하나의 큰 선물이며 하느님을 뵈올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당신께 항변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지켜봐 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오로지 할 일은 찬양뿐인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더 좋고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내 삶에 직접 참여하시어 나를 이끌고 계시니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도 하느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도 “너 어디 있느냐?”(창세3,9)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당신의 음성을 듣는 기다림 속에 살아 가야한다. 한시라도 끈을 놓치지 말고 부여잡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청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당신-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주님께 해당하는 갖가지 속성들이 비로소 이해된다. 주님이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당사자가 되셨다. 그것도 짐승을 둘로 가르고 그 사이를 걷는 계약의 의식을 행하시면서. 이분은 약속의 심판관이고 살아 계시며, 거룩하고 의로운 복수자이고, 마침내는 당신의 보편적인 의지를 통해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분은 세계의 주님이자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가까이 쳐다볼 수 없으며 숨어 계시며, 인간들에게는 계시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바를 신실이 지키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그분은 당신의 의로움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면서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다.

 그분은 “현존하는 야훼-하느님으로, 체험될 수 있는 하느님으로, 촉구하는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 그분을 선포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또 다른 당신인 이웃에게 봉사해야 한다.

 

Immanuel 이신 당신이여,

이 몸이 듣사옵니다.

한 말씀 하소서.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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