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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8주일 2014년 3월 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28 조회수488 추천수3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8주일 2014년 3월 2일

마태 6, 24-34.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복음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도 말합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예로 듭니다. 새들은 먹는 일에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들에 핀 꽃들은 자기 스스로를 치장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또 자기의 명예를 찾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투신(投身)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리고 사회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 사회가 자기에 대해 하는 사회적 자리매김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알립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타나는 가치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 안에도 그분이 살아계셔야 합니다. 이 복음이 ‘그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우리가 선택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배려와 사랑과 용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삶의 실천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한쪽을 떠받들면, 다른 한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만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생각하여도,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려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그분이 재물을 많이 주신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살기가 편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대우도 받습니다. 그 편리함과 그 대우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소홀히 합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동물은 원하는 것을 찾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1, 27)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도 스스로 실천할 때라고 말하겠습니다. 창세기가 알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창조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번성하며 살라고 축복하는 분입니다. 탈출기는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33,19)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분이 고쳐주고,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분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이었지만, 그 처형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고발하며, 공작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도, 그들을 성토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죽음으로 나갔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23,34).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류역사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 배워 실천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질서, 곧 가엾이 여기고 용서하는 질서를 사는 신앙인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많은 종교들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라고 가르칩니다. 입적(入寂)하신 법정(法頂) 스님으로 말미암아 각광 받은 ‘무소유(無所有)’라는 주제가 있고, 우리의 선비들이 살아서 보여준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경지도 있습니다. 모두가 종교적 직관을 배경으로 참다운 인간의 자유가 추구하는 경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무소유나 청빈낙도의 경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비극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16,19-31)에서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고,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라자로가 배를 채우지 못한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참다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서 관대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2고린 9,11)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쉽게 착각합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은 그것이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착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우리 삶의 원리로 살아 계실 것을 빕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고 있는지, 혹은 내 나라를 찾고 있는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찾고 있는지, 혹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기도 안에 잊지 말아야 할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간청할 것은 어느 간질환자 소년의 아버지(마르 9,24)와 같이 그 믿음의 부족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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